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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백남준은 졸업과 함께 [[독일]]로 유학을 떠나 [[뮌헨 대학교]] 및 [[쾰른 대학교]] 등에서 서양의 건축, 음악사, 철학 등을 공부하였다. 뮌헨 대학교 입학 1년 후에는 [[프라이부르크 고등음악원]]으로 옮겨 볼프강 포르트너 교수에게 배우지만, 곧 쇤베르크 이후 [[현대음악]]의 실험이 활발히 진행되던 [[다름슈타트 하기 강좌]]에 참여했다. 1958년 그 곳에서 현대음악가 [[존 케이지]]를 만나 그의 음악에 대한 파괴적 접근과 자유정신으로부터 깊은 영감을 얻었다. 이 영감은 "세계의 역사는 우리에게 알려준다. 주어진 게임에서 이길 수 없다면 규칙을 바꿔라" 라는 것으로 규정된다. 이후 1950년대부터 활발해지기 시작한 독일 라인 지역의 [[실험음악|액션뮤직]]의 현장에서 백남준은 ‘아시아에서 온 문화테러리스트’([[앨런 카프로]])라고 불릴 정도의 탁월한 퍼포먼스 아티스트로 활약했다. 1959년 ‘존 케이지에게 보내는 경의’에서 음악적 콜라주와 함께 피아노를 부수는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것을 시작으로, 바이올린을 단숨에 파괴하거나(바이올린 솔로) 존 케이지가 착용한 넥타이를 잘라버리는 퍼포먼스(피아노 포르테를 위한 연습곡)가 특히 유명하다. 이 초기 퍼포먼스에 대해 백남준은 스스로 "충격, 표현주의, 낭만주의, 클라이맥스, 놀라움, 기타 등등을 보여준 것"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1961년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의 음악 퍼포먼스 ‘오리기날레’에서 머리와 넥타이로 잉크를 묻혀 두루마리에 흔적을 남기는 독특한 퍼포먼스 [[심플]] [[머리를 위한 선]]율을 보여주기도 했다. 1960년대 초반 [[조지 마키우나스]], [[요셉 보이스]] 등과 의기투합하여 [[플럭서스]] 활동을 함께 전개했다. [[다다이즘]]에 영향을 받은 플럭서스는 헤라클레이투스가 주장한 ‘변화 생성의 흐름’ 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여 "목적이 없는 자유, 실험을 위한 실험"이라는 명목 하에 이벤트와 퍼포먼스 그리고 전위음악에 주력했고, 곧 유럽과 아시아 및 미국 등 세계로 퍼져나갔다.
1961년 백남준은 작곡가 [[슈토크하우젠]]이 중심이 된 쾰른의 [[WDR 전자음악 스튜디오]]에 출입했으며, 이때 1950년대부터 노버트 위너에 의해 제안된 '사이버네틱스' 개념 하에서 전자공학을 공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1964년]] 백남준은 일본으로 건너와 '로봇 K-456'을 제작했으며, 곧 세계 예술의 중심지 [[뉴욕]]으로 이주했다. 뉴욕 언더그라운드 필름 운동의 중심지 중 하나였던 시네마테크 필름메이커스에 관여했으며, 스스로 영상 작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1965년]] 소니의 [[포타팩]](세계 최초의 휴대용 비디오카메라)으로 미국 뉴욕을 첫 방문 중이던 교황 요한 바오로 6세를 촬영하여 곧바로 그 영상을 ‘[[카페 오 고고]]’에서 방영했다. 이것이 미술사에서는 한동안 공식적인 비디오 아트의 시작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지금은 1963년 첫번째 전시를 비디오아트의 기점으로 보고 있다. 또한 [[첼로]] 연주자이자 [[뉴욕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의 기획자였던 [[샬럿 무어먼]]과 함께 비디오 아트와 음악을 혼합한 퍼포먼스 작업을 활발히 펼쳤다. 특히 [[1967년]] 음악에 성적인 코드를 집어넣은 백남준의 ‘오페라 섹스트로니크’에서 샬럿 무어먼은 누드 상태의 첼로 연주를 시도하다가 뉴욕 경찰에 체포되어 큰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그 결과로 인해 예술 현장에서 누드를 처벌할 수 없다는 뉴욕의 법 개정이 이루어지는 획기적인 진전이 일어난다. 이후에도 미디어 아트가 미국 뉴욕을 중심으로 서서히 득세해가는 시대적 조류 속에서 두 사람은 ‘살아있는 조각을 위한 TV 브라’, ‘TV 첼로’, ‘TV 침대’ 등등 미디어 테크놀로지와 퍼포먼스를 결합한 많은 예술활동을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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