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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의 출현에 따라 약물에 대한 인식 또한 문자기록이 생겼다. 중국 [[상나라]]대의 갑골문자에는 '약' (藥) 자가 이미 있었다. 《[[설문결자]]》에서는「치병초, 종초, 악성」서조의 《시경》 과 《산해경》 중 이미 120가지 다중의 약물의 생산지, 효과작용과 치료성능을 기록해놨었다고 해설하고 있다. [[춘추전국시대]] 시기의 《오십이병방》 에는 이미 280여개의 처방이 기재되어 있으며, 사용되는 모든 약물 240여종에 달한다. 본초 , 이 단어는 《한서·평제기》에서 보이기 시작하였다. 현존하는 제일 이른 약물학 논문은 《[[신농본초경]]》이다. 비록 [[신농]]이라는 이름이 제목으로 붙어 있지만 한시기에 한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제일 마지막에는 동한말기 (기원전 2세기) 이전에 완성되었다는 고증이 있다.
 
한나라 말기에 이래 의가들이 인용한 약물종류는 날이 갈수록 증가하였다. 본초 관련 책자 수량과 종류도 크나큰 증가를 하였다. [[진나라]]의 [[갈홍]]은 《보박자》에서 처음으로 '약초'라는 단어를 기재하였다. 중요한 본초저작은 기원전 500년에 완성 되었다. 양나라 도홍경의 《본초경집주》 남조 유송시기에 뢰효작의 《포재론》,300종의, 300종의 약물의 조제 방법을 수록하였고 이는 중의 중국 최초의 조제 전문서적이다. [[수나라]]와 [[당나라]] 시대에는 남북이 통일하고 경제문화가 하루하루 번창해가면서 의약학도 비교적 크게 발전하였다. 이당시 844종의 약을 기록하였으며 본서의 완성의 국가의 행정 역량과 인력물력에 의지하였다. 이는 중국 최초 약전성(药典性) 본초로, 1542년 유럽 뉘른베르크의 약적 보다 500여년 일찍 나왔다.
 
송원시대에는 장원소가 쓴 《의학기원》에 오장육부의 모든 병의 용약심법(用药心法)을 담았다. 오장육부의 용약이론을 논증하여 다졌다. 그는 《진주낭》, 《오장육부 표준 한열허실 용약식》 , 《정고자제통법》중 약 중약귀경학설을 선도하였다. 후에 , 이동원(李东垣)의 《용약법상》 과 왕호고(王好古)의 《탕액본초汤液本草》 모두 약성을 탐구하고 토론했다.
 
명나라의 의약학자 이시전(李时珍) (1518-1593年) 27년을 경과해서 《본초강목 本草纲目》을 편찬했다 (전체 32권 약 200만 언言 1892종의 약 기록 그림 1100다 장, 부방11000여개),이것은 곧 세계에 널리 퍼졌다。이 책 이외에도 이시전은 수 많은 항목의 중의학책을 편찬하였다 예로 《빈호맥학》(濒湖脉学)이 있다.
근대의 주로 유행하는 과학중약은 전통방법을 이용하여 대규모의 약탕을 뽑아낸다. 그것을 농축하고 더나아가더 나아가 작은 알 형태의 약분으로 부형조재한다. 이는 쾌속의 약성 석출과 안전함 등의 특징이 있다. 대표적인 상점으로 대만의 순천당 압송영(顺天堂、庄松荣) 등이 있다.
 
==약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