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아편 전쟁"의 두 판 사이의 차이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다구포대]]를 잃은 불리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조약이 체결되긴 하였지만, 청 정부의 강경파들은 조약의 무효를 주장하였다. 이에 청 황제는 강경파들에게 심적으로 동요하여 [[1858년]] 후반 베이징에서 톈진조약 비준을 강행하려고 하는 영프 연합군을 막기 위해 다구포대에 포대와 기병을 추가 배치하였다. 따라서 조약을 체결하려는 영프 연합군과 조약 체결을 반대하는 청나라 군대가 서로 대립하게 되었고 전투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영국 함대는 상당한 피해를 입고 근방에 있던 미국함대의관전한 미국군 조시아 탈트날(Josiah Tattnall)의 도움을 받아 철퇴하게 되었고, 이 잠깐의 승리로 인하여 청 정부에서는 강경론이 득세하였다.
 
하지만 [[1860년]] 6월 영국과 프랑스는 전년도의 패배를 설욕하고자, 1859년의 소함대의 8배가 넘는 병력과 군함을 모아서 나타났다. 이들은 [[보하이 만|발해만]]의 여러 항구를 점령하고 다구포대에서 떨어진 곳에 병력을 상륙시켰다. 다구포대와 청 정부의 방어군을 격파한 영-프 연합군에 놀란 청 조정은 평화협상을 제의하였지만 영-프 측은 협상을 거절하였다. 이윽고 그들은 10월 베이징에 입성하였지만, 점령하지는 않고 베이징 근교에 머물렀다. 베이징에 머무는 과정에서 수많은 약탈과 방화를 자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