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아편 전쟁"의 두 판 사이의 차이

편집 요약 없음
}}
[[파일:Second Opium War-guangzhou.jpg|300px|섬네일|영프연합군의 [[광저우]] 약탈]]
'''제2차 아편 전쟁'''(第二次阿片戰爭)은 [[청나라]]와 [[영국]]·[[프랑스]] 연합군 간에 [[1856년]]부터 [[1860년]]까지 4년 동안 벌어진 전쟁이다. [[제1차 아편 전쟁]] 이후 원하는 만큼 개방이 이루어지지 않자 영국은 [[애로호 사건]]을 구실로 프랑스와 연합하여 청나라를 공격하였다. 애로호 사건으로 인해 발발했다고 하여 '''애로호 전쟁'''이라고도 한다. 이 전쟁에서 [[청나라]]가 완패함으로써 중화사상은 뿌리째 흔들리게붕괴게 되었고, 본격적으로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가 개막되었다.
 
== 배경 ==
전쟁이 끝난 뒤에도 영국의 대중 무역은 여전히 차의 수입과 아편의 수출이었다. 영국은 지속적으로 시장 개방을 확대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이것은 [[1851년]] [[태평천국]] 사건을 유발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수출이 지지부진하게 되자, 영국은 조약개정을 [[청나라]]에 요구하게 된다. 1854년 4월 영국, 프랑스, 미국 공사는 함께 [[광저우]]로 가서 양광총독([[:zh:兩廣總督|兩廣總督]]) 엽명침([[:zh:葉名琛|葉名琛]])에게 모든 내지(內地)와 연해도시의 개방, 상선과 군함의 양자강 자유왕래, 아편무역의 합법화, 내지(內地) 통관세의 폐지, 외국사절의 북경상주 등을 내용으로 하는, [[난징 조약]]의 개정을 요구하였다. <ref name="표교열"/> {{Rp|53~54}} 수출부진에는 위에 언급했듯이 값싼 중국 제품의 저향력, 자급자족적인 중국의 사회경제 구조, 은 유출로 인한 구매력 저하 등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영국은 깊숙한 내륙지역까지 진입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자유로운 내지여행과 북쪽의 항구 개방 등을 요구했던 것이다. 두 번째 개정교섭에서는 1856년 5월 미국 공사가 광저우에서 공사의 북경상주, 중국전역의 개방, 선교의 자유 등을 요구하였다. <ref name="표교열"/> {{Rp|54}}
 
하지만, 청나라 조정에서는 조약개정에 응하지 않자, 영국은 무력을 사용하고자 생각하게 되었는데, 이때 마침 [[1856년]] 10월 [[광저우]] 앞 [[주강]](珠江)에 정박하고 있던 해적선 애로호의 영국 국기가 내려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ref>{{서적 인용 |저자 = 김용구 |제목 = 세계외교사 |초판 = 1989 |판=1995(上•下 合本) |출판사 = 서울대학교 출판부 | id={{ISBN|89-7096-413-4}} |쪽= 206 |인용문 =애로우號는 로챠르(Lorchar)型의 中國帆船으로서 중국인의 소유였으나 船籍을 홍콩에 두고 있었고 船長은 영국인이었다. 이 선박이 廣東 앞에 정박하고 있던 1856년 10월 8일 淸國관헌이 그 선박의 선원 11명을 해적의 용의자로 체포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 영국의 주장에 의하면 이 선박은 홍콩에 船籍을 둔 영국선박으로서 선원을 체포한 것은 국제법위반이고 더욱이 게양된 영국국기를 내리게 한 것은 국가모독이라는 것이다.}}<!--그러나 실은 애초에 그배는 어떤 국기도 게양하지 않았었고 선원이 체포되자 그제서야 영국기를 걸고 항의한 것이다.--></ref> <ref name="신승하 근대"/> {{Rp|174~176}} <ref name="Morse"/> {{Rp|Chap.16}} <ref name="Holt"/> {{Rp|Chap.15}} (→[[애로호 사건]]) 당시 대중국 강경론자로서 영국의 수상이 된 [[헨리 존 템플]]은 사건 보고를 듣고 충분한 구실이 된다고 여기고, 1857년 2월 의회에 군비와 원정군 증강을 위한 경비를 제출하였다. 당시 의회에서는 이처럼 사소한 사건으로 전쟁까지 한다는 것은 실로 부끄러운 일이라며 반대하는 의견도 많았다. 결국 상원에서는 통과되었으나, 하원에서는 부결되고 말았다. 이에 [[헨리 존 템플]] 수상은 하원을 해산시키고 총선거에 의한 신임을 묻게 되었다. 결국 새로 구성된 하원에서는 대중국 전쟁문제를 동의하였다. <ref>{{서적 인용 |저자 = 김용구 |제목 = 세계외교사 |초판 = 1989 |판=1995(上•下 合本) |출판사 = 서울대학교 출판부 | id={{ISBN|89-7096-413-4}} |쪽= 207 |인용문 =파머스턴수상은 전쟁수행에 관한 예산안의 통과를 上•下院에 요구하였다. 1857년 2월 上院은 정부안을 통과시켰으나 下院에서는 부결되었다. 수상은 下院을 해산시키고 총선거에 의한 신임을 묻게 되었다. 그리하여 새로 구성된 下院에서는 파머스턴의 중국전쟁 수행을 동의하였다. }}</ref> <ref name="신승하 근대"/> {{Rp|177}} 1856년 [[광시 좡족 자치구|광시]]에서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오귀스트 샤프들랭]](Auguste Chapdelaine)이 처형돼 [[프랑스]]와 [[영국]]이 연합했다.
 
== 제2차 아편전쟁 ==
1857년 영국은 애로호 사건을 구실로 [[프랑스]]와 연합군을 구성해 [[광저우]] 시내로 침입하여 이 해 12월, 광저우는 점령되고 시가지 곳곳에 [[불]]을 지르고 민간인을 죽였다. 영국-프랑스군은 [[광저우]]를 점령한 이후에도 3년 동안 지방관의 괴뢰정권을 앞세워 연합군위원회(영국, 프랑스)의 점령행정이 실시 되었다. 이후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1858년]] 북상하여 [[다구포대]](大沽炮台)를 점령하였고, [[북경]]의 관문인 [[톈진]]까지 점령하자 청 정부는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톈진조약]]을 맺었다. [[미국]]과 [[러시아]]는 전쟁 후반기에 협력을 제의하였으나, 실제로 군사적인 도움을 주지는 않았다.
 
[[1858년]] 6월에 맺어진 조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전쟁의 재개 ===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다구포대]]를다구포대를 잃은 불리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조약이 체결되긴 하였지만, 청 정부의 강경파들은 조약의 무효를 주장하였다. 이에 청 황제는 강경파들에게 심적으로 동요하여 [[1858년]] 후반 베이징에서 톈진조약 비준을 강행하려고 하는 영프 연합군을 막기 위해 다구포대에 포대와 기병을 추가 배치하였다. 따라서 조약을 체결하려는 영프 연합군과 조약 체결을 반대하는 청나라 군대가 서로 대립하게 되었고 전투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영국 함대는 상당한 피해를 입고 근방에 있던 관전한 미국군 조시아 탈트날(Josiah Tattnall)의 도움을 받아 철퇴하게 되었고, 이 잠깐의 승리로 인하여 청 정부에서는 강경론이 득세하였다.
 
하지만 [[1860년]] 6월 영국과 프랑스는 전년도의 패배를 설욕하고자, 1859년의 소함대의 8배가 넘는 병력과 군함을 모아서 나타났다. 이들은 [[보하이 만|발해만]]의 여러 항구를 점령하고 다구포대에서 떨어진 곳에 병력을 상륙시켰다. 다구포대와 청정부의 방어군을 격파한 영-프 연합군에 놀란 청 조정은 평화협상을 제의하였지만 영-프 측은 협상을 거절하였다. 9월하순9월 하순 프랑스군과 영국군 베이징 근교 퉁저우 장자완과 바리차오 에서 청나라 군대를 패퇴했다. 프랑스군 사령관 샤를 쿠생몽토방(Charles Cousin-Montauban)귀국 후 나폴레옹 3세 황제로부터 팔리카오 백작(Comte de Palikao)이라는 작위를 수여했다. 이윽고 그들은 10월 베이징에 입성하였지만, 점령하지는 않고 베이징 근교에 머물렀다. 베이징에 머무는 과정에서 수많은 약탈과 방화를 자행했다.
 
청황제는 베이징에서 멀리 북쪽으로 떨어진 여름별장에 피신하였고, 황제의 형제 중 한 명인 [[혁흔|공친왕]]을 남겨 협상을 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