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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발해]]가 멸망한 뒤 거란 통치자가 [[동단국]]의 발해인을 서쪽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동단국도 제어가 어렵다는 이유로 서천시키자 발해의 옛 지역은 점점 비세 되어 [[흑수말갈]]이 발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됐다. 당시에 여진은 통일되지 못하여 여진의 어떤 부족 혹은 부락연맹을 가리킬 뿐이었다. 동단국이 서천한 이후에 여진은 [[고려]]에 신속되거나 혹은 거란에 신속되어 이반과 복종과 무상하니 [[요나라]]는 이를 일러 "기미의 추장일 따름"이라고 하였다.
금나라 건국 이전에 [[여진족]]들은 지금의 [[만주]] [[헤이룽장 성]]에 거주하던 [[말갈족]]이었다. 당시 말갈족은 [[읍루]]의 후손으로 추측되고, 금나라 멸망후 만주에 남았던 여진족들은 정체성을 유지한 채 1635년까지 존속했다. 여진이라는 표현은 《[[요사]]》 902년 정벌기록에서 첫 등장하며, 여진족 언어의 "주션"이라는 단어에서 나왔다. 이 단어의 어원은 현재 학계에서 합의되지 않은 상태이다.
 
[[요 흥종]]과 [[요 도종]] 시기에 이르러 [[생여진]] [[완안부]]가 점차적으로 강성해지면서 생여진의 각 부를 복속시키는 동시에 요 조정의 대리인 자격을 획득하였다. 완안부는 처음 흥기할 때에 동북쪽의 전 지역을 빼앗아 요를 대신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거란인의 능멸과 학대에 고통받게 되자 요의 압박에서 벗어나려고 일어난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천조제]]가 사냥과 술을 좋아하여 정사를 태만하게 하자 [[완안 아골타]]는 종주국을 경시하게 되었고 마침내 나라를 빼앗으려는 마음이 점차 생기게 되었다. 여진이 반란을 일으킨 주된 원인은 요나라가 그들에게 일삼은 착취에서 비롯된 것이다.
금나라의 황제들의 조상은 고려에서 온 [[함보]]라는 기록이 [[금사]]에 적혀있다. 여진족(女眞族)의 기원(起源)은 어디이며 누구인가를 쓴 《통고》와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ᠮᠠᠨᠵᡠᠰᠠᡳ ᡩᠠ ᠰᡝᡴᡳᠶᡝᠨ ᡳ ᡴᡳᠮᠴᡳᠨ ᠪᡳᡨᡥᡝ )에서는 함보가 [[신라]](新羅)에서 왔다고 하였다. 한국 [[재야사학자]]들은 마의태자가 함보라고 주장하지만, 성과 이름이 다르며 마의태자 설화로 보아 마의태자는 한반도 내에서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경순왕과의 관계도 금사에 적혀 있지 않으므로 별개의 인물이라고 보면 된다. 저 기록을 해석하면 여진계 신라인으로 추정된다.
 
구체적으로 첫 번째 원인은 요나라의 통치계급이 여진의 토산품을 강제로 징수하거나 저가로 수매하는 것을 의미하는 '타여진'인데 일종의 수탈의 의미를 지녔다. 이러한 경제적 착취는 정치적 압박은 물론이고 사회적 문제로 이어졌다. 바야흐로 요가 강성할 따에는 매년 사자를 보내면서 천사라 칭하였는데 은패를 차고서 스스로를 구별하였다. 그들은 매번 여진국에 이를 때마다 저녁이 되면 미녀들을 침석에 들게 하였다. 이처럼 시간 지날수록 생여진이 대한 거란의 억압과 수탈의 강도는 점차 높아졌고 이에 비례하여 여진인의 분노 또한 극에 달하기 시작했다.
여진족은 [[요나라]]의 지배를 받으며, 하얼빈 동남쪽에 있었던 완안부를 중심으로 세력을 키웠다. 이후 완안부의 추장 아골타는 [[1115년]]에 요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 [[회령부|상경회령부]]에서 금나라를 세웠다. 금은 요의 군대를 격파하며 영역을 확대하고, [[북송]]과 동맹을 맺어 [[1125년]] [[금 태종|태종]] 때 요나라를 멸망시켰다. 그 후 북송을 멸망시키고 화베이 지역을 통치하려고 장방창(張邦昌)의 초(楚)와 유예(劉豫)의 제(齊)를 통해 간접 지배를 꾀했다. 그러다가 여의치 않자 직접 지배하기 시작했다.
 
두 번째, [[북송]]은 요 동쪽 큰 바다에서 생산되는 북주(北珠)를 선호하였다. 따라서 북송은 각장무역을 통해 이것을 획득하였고, 거란 통치자는 여진지역의 큰 바다에서 이를 얻어 북송의 고급사치품과 교환했다. 진주는 조개에서 채취하는게 가을이 되면 물이 차가워 사람이 직접 물에 들어가 진주를 채취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기러기가 이 조가를 먹으면 모이주머니에 진주가 저장되어 있었으므로 맹금류인 해동청을 이용해 기러기를 잡아 진주를 획득했던 것이다. 그런데 해동청의 포획을 둘러싸고 거란 통치자와 여진의 각 부는 갈등이 심화됐고 심지어 요나라의 명운에도 직접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러한 해동청의 징발은 더 이상 생여진 부족장들을 참을 수 없게 만들었으며 마침내 1096년에는 흘석렬부(紇石烈部)의 아합관과 석로가 오국부로 통하는 응로를 차단하고 요나라의 포응사자를 살해하자 요나라는 생여진 절도사인 완안부의 [[완얀 잉게|영가]]에게 이들을 토벌하게 하였다. 요가 영가를 응로지전이 참여시켜 응로를 원할하게 만들고자 했던 반면 영가는 요의 위세를 빌어 여진 각 부를 통일하고자 했다. 영가가 병사한 후에 형 핵리발의 동생인 [[완얀 우야수|오아속]]이 절도사직을 계승하면서 여진 부족에 대한 통제를 더욱 강화했다. 또한 뒷날에 대한 근심을 제거하기 위해 고려와도 협조하였다.
 
세 번째, 요 황제가 매년 가을 사냥을 할 때면 여진 수령은 그곳으로 가서 조견해야 했으나 그것이 너무 고생스러워 불만이 팽배해졌다. 1112년에 [[천조제]]가 [[혼동강]]에 이르러 낚시를 했는데 무릇 천리 이내에 있는 여진 추장들은 관례에 따라서 그를 조견해야만 했다. 이때 아골타는 그의 동생인 [[금 태종|오걸매]] 및 점한, 호사 등과 함께 참가하였다. 술자리에서 천조제는 여진의 추장들에게 춤을 추도록 하였다. 이에 아골타는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황제는 그를 죽이려고 하였지만 주변의 만류로 일단 중지하였다. 아골타는 혼동강의 연회에서 돌아온 후에 지금의 [[휘발하]] 유역의 요적의 여진 부락들을 더욱 더 병탄하였다. 그 부락들의 추장 중에 조삼하골산이 요로 도망가서 이러한 사실을 알리자 요 조정에서는 사자를 파견해 책임을 물었다. 아울러 몇 차례 아골타에게 입조하라고 하였지만 그는 매번 병을 구실삼아 가지 않았다. 이에 생여진과 요의 관계는 파경에 직면하여 일촉즉발의 형세가 되었다.
 
여진의 완안부는 그 세력이 점점 강성해졌고 상기한 세 가지 등의 원인으로 요와 충돌하기에 이르렀다. 아골타는 흘석렬부의 반인 아소를 찾는다는 명분으로 계속 요나라의 허실을 탐색하였고, 이 사건은 반요투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마침내 1114년 9월에 아골타가 영강주로 진군하였으나 천조제는 경주에서 사냥만 하였다. 단지 해주자사 고선수에게 발해군을 거느리고 대응하여 구원하게 하였다. 하지만 발해군은 대패하여 전장에서 죽거나 혹은 사로잡혀서 포획되지 않은 자가 얼마되지 않았다. 결국 여진군의 일격으로 요 병사는 도망가다가 10중에 7~8명이 서로 밟혀죽었다. 영강전투를 승리로 이끈 여진은 포로로 잡힌 방어사 대약사노를 비롯한 발해인 장수들을 방면함으로써 발해인을 투항하도록 유도했다. 이외에 아골타는 여진이 투항한 발해인 양복과 알답자를 고향으로 보내 마을 사람들을 초유하게 하였다. 그들에게 "여진과 발해는 본래 한 집안인데 내가 군사를 일으킨 것은 죄인을 정벌하는 것으로 무고한 사람이게 함부로 미치지는 않는다."라고 선동하기 하는 한편 대장 완안 루실을 요동 남쪽으로 파견해 계요적여진을 초유하게 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요나라의 통치력을 더욱 악화시켰다.
 
영강주의 전쟁이 끝난 직후인 11월에 거란은 소규리를 도통, 소달불야를 부도통으로 삼아 영강주에서 멀지 않은 압자하 북쪽에 거란 및 [[해족|해]]의 보병과 기병 10만을 주둔시켰다. 그러나 여진군은 압자하를 유유히 도강하여 출하점에서 요군을 궤멸시켰다. "요인들은 일찍이 여진 병사가 만 명에 이르면 대적할 수 없다"라고 말한 바 있다. 영강주와 출하점의 대승은 여진이 마침내 요나라의 통치를 벗어나 금를 건국하는데 기초기 되었다. 얼마 지나서 아골타의 동생 오걸매 및 살개, 발해인 양박 등의 권유로 아골타는 1115년에 황제에 즉위하고 국호를 대금(大金, {{llang|juc|/amba-an antʃu-un/}}), 연호를 수국(收國, {{llang|juc|/gurun baxa uai/}})으로 정했다.<ref>{{서적 인용|author=나영남|authorlink=|title=요·금시대 이민족 지배와 발해인|series=외대 역사문화 연구총서|publisher=신서원|isbn=9788979405538|page=261~266}}</ref>
 
영강주 및 출하점, 호보답강 전쟁에서 계속되는 요군의 패배는 피지배 종족의 반요투쟁을 더욱 격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이들의 이반은 다종족국가였단 요나라를 한 순간에 붕괴시켰다. [[한족|한인]]이던 발해인이던 간에 스스로 왕조를 개창하지 못한 그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맞는 통치자를 선택하였다. 동북 지역의 제 종족, 특히 발해인은 유대감을 지닌 금에 협력하였다.<ref>{{서적 인용|author=나영남|authorlink=|title=요·금시대 이민족 지배와 발해인|series=외대 역사문화 연구총서|publisher=신서원|isbn=9788979405538|page=267}}</ref>
 
또한 요의 위기가 나날이 깊어가던 중에 거란 통치 내부에서도 다시 분열이 발생해 소봉선과의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야율 여도가 금으로 망명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천조제는 야율 여도가 향도하는 여진군의 파상적인 공세를 피해 1122년에 협산으로 파천하였다. 천조제가 파천한 이래 수일간 황명이 끊기자 [[연경]]를 지키던 번한관료들, 즉 이처온 부자는 소간, [[야율대석]], 좌기궁, 우중문, 강공필, 조용의 등과 함께 원군의 후원을 빌어 천조제를 상음왕(湘陰王)으로 격하시키고, 위국왕 [[야율순]]을 천석황제(天錫皇帝)로 옹립하였다. 이를 역사상 북요(北遼)라고 부른다.
 
둘로 쪼개진 요는 그나마 미약한 역량마저 분산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북송과 금의 협공을 막아낼 수 없기 되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금은 [[상경임황부|상경]] 및 [[중경대정부|중경]]을 함락하였고 이어서 [[서경대동부]]도 함락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황태후가 된 덕비 소씨가 지키던 거용관도 무너져 [[연경]]은 금군에게 함락되었다. 고립무원이 된 천조제는 1125년 2월에 협산에서 나와 당항으로 도주하다가 금의 장수 완안 루실이게 체포되었다. 8월에 금 내지로 끌려온 천조제는 해빈왕(海濱王)으로 책봉되었으니 요는 9대 219년만에 멸망하였다.<ref>{{서적 인용|author=나영남|authorlink=|title=요·금시대 이민족 지배와 발해인|series=외대 역사문화 연구총서|publisher=신서원|isbn=9788979405538|page=269~271}}</ref>
 
그 후 북송을 멸망시키고 화베이 지역을 통치하려고 장방창(張邦昌)의 초(楚)와 유예(劉豫)의 제(齊)를 통해 간접 지배를 꾀했다. 그러다가 여의치 않자 직접 지배하기 시작했다.
 
[[1142년]]에 [[금 희종|희종]]은 남송과 조약을 체결했다. 그 조약에 따르면, 남송은 해마다 금나라에 세폐를 주고, 금의 황제는 송의 황제를 신하로 삼았다. 상경회령부에서 [[중도 (금나라)|중도대흥부]](지금의 [[베이징]])로 옮기고 수많은 여진인을 화베이로 이주시켰다. 해릉왕은 종실 내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 남송을 침공해서 통일 중국의 황제가 되려고 했다. 그러나 강제 징병에 시달리던 거란족이 반란을 일으킨 틈을 타 종실 내 반대 세력이 랴오양에서 오록(烏祿, [[금 세종|세종]])을 황제로 옹립했다. 세종은 남송과 국교를 회복하고 거란족의 반란을 진압하는 등 대내외의 안정을 회복했다. 그리고 관리를 숙정하고 긴축 재정을 운용해 정치·사회의 안정을 이룩했으며, 남송과 평화를 유지해 금나라 제일의 명군이 되었다. 또한 몰락하는 맹안·모극 호를 보호하고, 여진어 사용을 장려하며, 여진족의 풍습을 보호하는 정책을 실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