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나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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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황태후가 된 덕비 소씨가 지키던 거용관도 무너져 [[연경]]은 금군에게 함락되었다. 고립무원이 된 천조제는 1125년 2월에 협산에서 나와 당항으로 도주하다가 금의 장수 완안 루실이게 체포되었다. 8월에 금 내지로 끌려온 천조제는 해빈왕(海濱王)으로 책봉되었으니 요는 9대 219년만에 멸망하였다.<ref>{{서적 인용|author=나영남|authorlink=|title=요·금시대 이민족 지배와 발해인|series=외대 역사문화 연구총서|publisher=신서원|isbn=9788979405538|page=269~271}}</ref>
 
아골타의 뒤를 이어 즉위한 오걸매는 곧바로 북송 공략을 시작해, 1126년에 수도인 [[카이펑|개봉]]을 함락하고 황제 [[송 흠종|흠종]]과 상황 [[송 휘종|휘종]]을 모두 포로로 붙잡는 '[[정강의 변]]'을 일으켰다. 송의 황실과 귀족은 남쪽으로 도주하여 [[남송]]을 열었다. 그러나 금은 군사적 압박을 계속하여 1142년 '황통(皇統)의 강황'를 맺어 화이수이를 양국 경계로 삼았고, 남송은 매년 은 25만 냥과 비단 25만 필을 공물로 바치기로 합의했다. 이는 1005년 북송과 거란이 맺었던 '[[전연의 맹]]'보가 훨씬 더 가혹한 것으로서 금이 정복왕조로서의 기틀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ref>{{서적 인용|author=김호동|authorlink=|title=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series=아틀라스 역사 시리즈|publisher=사계절|isbn=978-89-5828-932-6|page=119}}</ref>
그 후 북송을 멸망시키고 화베이 지역을 통치하려고 장방창(張邦昌)의 초(楚)와 유예(劉豫)의 제(齊)를 통해 간접 지배를 꾀했다. 그러다가 여의치 않자 직접 지배하기 시작했다.
 
[[1142년]]에 [[금 희종|희종]]은 남송과 조약을 체결했다. 그 조약에 따르면, 남송은 해마다 금나라에 세폐를 주고, 금의 황제는 송의 황제를 신하로 삼았다. 상경회령부에서 [[중도 (금나라)|중도대흥부]](지금의 [[베이징]])로 옮기고 수많은 여진인을 화베이로 이주시켰다. 해릉왕은 종실 내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 남송을 침공해서 통일 중국의 황제가 되려고 했다. 그러나 강제 징병에 시달리던 거란족이 반란을 일으킨 틈을 타 종실 내 반대 세력이 랴오양에서 오록(烏祿, [[금 세종|세종]])을 황제로 옹립했다. 세종은 남송과 국교를 회복하고 거란족의 반란을 진압하는 등 대내외의 안정을 회복했다. 그리고 관리를 숙정하고 긴축 재정을 운용해 정치·사회의 안정을 이룩했으며, 남송과 평화를 유지해 금나라 제일의 명군이 되었다. 또한 몰락하는 맹안·모극 호를 보호하고, 여진어 사용을 장려하며, 여진족의 풍습을 보호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뒤이은 [[금 장종|장종]]은 중국 문화에 정통했지만, 재정을 방만하게 운용한데다 황하 범람과 몽골계 유목민이 침입해서 재정이 부족해졌고, 실지 회복을 노리는 남송의 도전으로 심각한 재정난에 직면했다. [[금 위소왕|위소왕]] 때 몽골군의 침입으로 본거지인 중국 동북지방을 빼앗겼고, 남송과 [[서하]]의 공격도 받았다. [[금 선종|선종]] 때인 [[1214년]]에 몽골의 침입을 받고 수도를 변경으로 옮겼지만, 한인과 불화가 깊어져 더욱 혼란에 빠졌다. [[금 애종|애종]]은 변경을 탈출해 허난지역을 전전하다가 [[1234년]]에 채주에서 몽골과 남송의 연합군에게 포위당하자 자살했다. 뒤이은 [[금 말제|말제]]도 몽골군에게 살해되어 금은 10대 120년 만에 멸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