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옥: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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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도저"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김현옥은 별명답게 진짜 불도저처럼 아파트 건설을 밀어붙였다. 김현옥은 1969년부터 1971년까지 3년 동안 240억 원을 투입해 2천동 10만호의 아파트를 산비탈과 고지대에 있는 무허가 불량주택을 모두 헐고 짓는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고, 1969년의 경우 서울시 총예산(416억원)의 12.4%에 해당하는 51억원을 시민아파트 건설에 썼다.<ref name="강준만">{{서적 인용 |저자=강준만 |제목=한국현대사산책 1970년대편 1권 |연도=2002 |출판사=인물과사상사 |위치= |페이지=51~52}}</ref>
김현옥은 [[세종로]]와 명동에 지하도를, 종묘 앞 필동 간 소개도로에 [[세운상가]]를 건립하고, [[여의도]]에 제방을 구축해 여의도의 현재 모습을 갖추게 하였다. [[강변북로]]를 건설하고, 국내 최초의 고가도로인 [[아현고가도로]]와 [[서울역고가도로]]를 건설하였다. [[남산터널|남산 1,2호 터널]]과 [[삼청터널]] 그리고 [[사직터널]]도 개설하였다. 복개된 청계천 위에는 [[청계고가도로]]를 건설하였다.
 
[[1970년]] [[4월]] [[와우 아파트 붕괴사고]]의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다. 그 후 [[1971년]] [[대한민국 내무부|내무부]] 장관으로 복귀, 1973년 2월까지 있었다. 1971년 2월에는 육상경기연맹 회장에 추대되었고, 1972년의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73년 2월 내무부장관을 사퇴한 이후 유스호스텔협회 회장과 복지법인 정립회관 이사장 등으로도 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