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청 (전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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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삭 3년 겨울(기원전 127년) 흉노 선우 [[군신선우]]가 죽자 동생 [[이지사선우]]가 태자 [[연제어단]]을 쫓아내고 즉위했고,<ref name=":0" /> 원삭 3년 여름(기원전 126년)에 바로 수만 기가 쳐들어와 대군태수 공우(恭友)를 죽였다.<ref name=":0" /><ref name=":1" /> 원삭 4년(기원전 125년)에도 대군·[[정양군 (행정 구역)|정양]]·[[상군]]으로 쳐들어와 수천 명을 죽이고 노략질했다.<ref name=":0" /><ref name=":1" /> 그리고 흉노의 [[우도기왕|우현왕]]이 허타오 지역을 빼앗긴 건에 분노해 자주 쳐들어와 도둑질했다.<ref name=":0" /> 원삭 5년(기원전 124년) 봄, 위청은 거기장군으로서 다시 흉노 원정의 대장을 맡아<ref name=":0" /> 3만 기를 이끌고 고궐에서 출진했다. 위청이 거느린 여섯 장군 중 위위·유격장군 소건, [[좌풍익|좌내사]]·강노장군 [[이저]], 태복·기장군 [[공손하]], 대[[제후상|상]]·경거장군 [[이채 (전한)|이채]] 넷은 삭방에서 출진했고, [[대홍려|대행]]·장군 이식, 안두후·장군 장차공은 우북평에서 출진했다. 우현왕은 한나라 군대가 오지 못하리라고 여기고 술에 취해 있었기에, 한나라 군대는 밤을 틈타 우현왕을 포위했고, 우현왕은 애첩 한 명과 친위군 수백 기만 거느리고 포위망을 빠져나가 달아났다. 경거교위 곽성(郭成) 등이 쫓아갔으나 잡지 못했다. 우현왕의 비왕(裨王) 십여 명과 남녀 만 오천여 명, 가축 수천백만 마리를 얻고 돌아왔다. 도중 국경 요새에 이르러 무제의 사자를 만나 [[대장군]]에 임명되었고 모든 장군을 거느리게 되었다. 그리고 무제는 위청의 아들 [[위항]]을 [[예장군|의춘]]후에, [[위불의]]를 [[위군|음안]]후에, [[위등]]을 [[동군|발간]]후에 봉했다. 전쟁은 무제의 신령과 교위들의 힘으로 공을 세웠을 뿐인데 자기 아들들에게 감히 포상을 받게 할 수 없다고 사양하자, 무제는 호군도위 공손오를 합기후에, 도위 [[한열]]을 용액후에, 공손하는 남표후에, 이채는 낙안후에, 교위 [[이삭 (전한)|이삭]]은 [[하내군|지]]후(軹侯)에, 교위 [[조불우]]는 수성후(隨成侯)에, 교위 [[공손융노]]는 종평후(從平侯)에, 이식·[[이저 (전한)|이저]]·교위 두여의(豆如意)는 [[관내후]]에 봉했다. 이해 가을에 흉노가 대군으로 쳐들어와 대군교위 주영(朱英)을 죽였다.
 
원삭 6년(기원전 123년) 봄, 합기후·중장군 공손오, 태복·좌장군 공손하, 흡후·전장군 조신, 위위·우장군 소건, 낭중령·후장군 이광, 우내사·강노장군 이저와 함께 정양에서 십여 만 기를 거느리고 출진해 수천 급을 베고 돌아왔다. 한 달 여 지나 다시 정양에서 출진해 만 여 명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그러나 조신과 소건이 3천여 기를 거느리고 흉노 선우와 맞닥뜨려 싸워 조신은 흉노에 투항하고 소건은 모든 군사를 잃고 홀로 달아났다. 소건의 죄를 정하려고 군정 굉(閎)·장사 안(安)·의랑 주패(周霸) 등과 논의했는데, 주패는 소건을 참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굉과 안은 반대했다. 위청은 천자의 뜻에 맡겨야 한다고 하고, 군리들이 모두 동의해 소건을 행재소로 압송했다. 국경 요새로 들어와 군을 파했다. 조신과 소건 두 장군의 군대를 잃었고 조신이 적에게 투항했으므로 봉읍이 더 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생질 곽거병을 표요교위로서 종군시켰는데, 곽거병이 공을 세워 관군후에 봉해졌고 상곡태수 학현도[[학현]]도 공을 세워 열후가 되었다.
 
돌아와서는 영승(甯乘)이란 사람의 조언을 들어 무제의 총애를 받는 왕부인에게 5백 금을 주어 축수했는데, 무제가 이에 대해 묻자 사실대로 말했고 영승은 [[동해군|동해]]도위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