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라스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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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부의 다비드 드 보드링이 이 사건을 조사하고 사건을 발표했다. 이 청년은 가톨릭으로 개종할 것을 선언하고, 개종하기로 했는데 개신교인이었던 아버지 칼라스가 이것을 견딜 수 없어서 아들을 살해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후 칼라스의 가족은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아버지는 거열형에 처해져 처형 되고 가족들은 추방당한다.
 
당시 툴르즈는 친가톨릭적 성향이 특히 강했는데, 그 예로 당시보다 200여년 전 약4000여명의 시민들이개신교인들이 이단으로 몰려 가톨릭 교도들에게 학살되었는데 이 날이 돌아오면 툴르즈인들은 성대한 축제를 벌일 정도였다. 사건 당일 칼라스의 아들은 자신이 프로테스탄트라는 이유로 취업에 제한을 받는 등 삶을 비탄하여 목을 매어 자살했는데 그 광경을 본 몇몇 가톨릭 교도들이 칼라스와 그 가족이 아들의 개종을 막으려 죽였다고 소문을 퍼뜨렸다. 사건이 벌어진 1762년은 개신교인 학살사건 200주년 되는 해로 가톨릭 교인들은 시내에 교수대를 세우고 칼라스 가족들을 교수대에 세워야 한다고 외쳐댔다.<ref>볼테르《관용론》(한길사, P29)</ref>, 이에 고무된 시의 관료들이 칼라스와 가족들을 투옥시키고 가장인 칼라스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형을 집행했다.<ref>김우영《볼테르의 종교적 관용 사상 : 무신론자 배제론과 세속적 국가 종교론을 중심으로》(서강대학교대학원 석사논문)</ref>
 
칼라스의 처형에 찬성한 판사들은 이 허약한 노인은 [[거열형]]의 고통을 이길 수 없을 것이고, 그래서 형틀에 묶이면 자신의 죄와 공모자들의 죄를 자백할 것이라며 나머지 판사들을 설득했다. 그러나 판사들은 칼라스의 형을 집행하면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 노인은 바퀴에 묶여 죽어가면서도 하나님을 불러 자신의 결백함의 증인으로 삼았으며 또한 잘못을 저지른 판사들을 용서해달라고 기원했다. 볼테르는 이 처형을 보며 이런 명언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