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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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레닌의 사후 집권한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은 세계 혁명론을 주장하는 [[레프 트로츠키|트로츠키]]와는 달리 [[일국사회주의]]를 내세우며 [[1928년]]에는 경제 발전 5개년 계획을 발표하였다. 또한 그 과정에서 [[레프 트로츠키]]를 외국으로 추방하였고, 이후 [[멕시코]]에서 트로츠키를 살해하는 등 반대파를 [[숙청]]하였다.
 
[[파일:Bundesarchiv Bild 183-R80329, Josef Stalin.jpg|섬네일|left왼쪽|[[이오시프 스탈린]]]]
=== 제2차 세계 대전 ===
{{본문|동부 전선 (제2차 세계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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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냉전 ===
{{본문|냉전}}
[[파일:Szent István körút a Falk Miksa (Néphadsereg) utca felől a Honvéd utca felé nézve. A szovjet csapatok ideiglenes kivonulása 1956. október 31-én. Fortepan 24787.jpg|섬네일|right오른쪽|[[헝가리 봉기]] 때 [[부다페스트]]로 입성하는 소련군 (1956년)]]
소련의 [[중앙유럽]] 점령 이후 중앙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연이어 공산주의 정부가 들어서 차츰 소련의 위성 국가가 되어갔다. 이들은 1955년 [[바르샤바 조약 기구]]를 결성, [[미국]]을 비롯한 자유 진영에 맞서려고 했다. 미국은 이에 대항하기 위해 [[마셜 플랜]]을 발표, [[서유럽]]의 경제 부흥을 도우려고 했다. 또, [[북대서양 조약 기구]]를 창설하여 이 과정에서 양 진영은 대립하게 되었는데, 이로부터 냉전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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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에 들어와 [[니키타 흐루쇼프|흐루쇼프]] 체제가 안정되면서 미국과의 관계는 다소 개선되었다. 그러나 [[니키타 흐루쇼프|흐루쇼프]]의 개혁 노선에 회의적이었던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이 이끄는 [[중화인민공화국|중국]]과의 관계는 반대로 악화되었다.
 
[[파일:Nixon Kosygin May 1972.jpg|섬네일|left왼쪽|[[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과 [[알렉세이 코시긴]] 소련 수상이 양국간 과학 기술 협정 동의서에 조인하는 모습 (1972년)]]
[[1964년]]에 실각한 [[니키타 흐루쇼프|흐루쇼프]]에 이어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소련의 지도자가 된 이후, 식료품이나 연료, 생활필수품의 공급 부족으로 국민 생활이 어려워졌다. [[1968년]] 8월에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프라하의 봄]]이라고 불리는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자 소련은 무력으로 민주화 운동을 진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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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레스트로이카 ===
{{본문|페레스트로이카}}
[[파일:Reagan and Gorbachev hold discussions.jpg|섬네일|right오른쪽|350px|[[미하일 고르바초프]]와 [[로널드 레이건]]의 회담 (1985년)]]
[[1982년]] 11월 브레즈네프가 죽고 [[유리 안드로포프]]가 소련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러나 [[1984년]] 2월 안드로포프가 죽고 안드로포프를 승계한 [[콘스탄틴 체르넨코]]마저 [[1985년]] 3월에 죽자, 54세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소련의 지도자가 되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고르바초프]]는 [[1970년대]] 초부터 시작된 소련의 경제 침체를 타개하기 위해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정보 공개, 개방)가 진행되었다. 또한 부패한 정치체제의 개혁이 추진되어, [[1990년]]에 지금까지의 [[소련 공산당]] 1당 독재 대신 복수 정당제와 대통령제가 도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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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 ==
[[파일:Redsquarenight.jpg|섬네일|right오른쪽|220px|[[붉은 광장]]]]
 
[[레닌]] 시대 초기와 [[고르바초프]] 시대 후반의 잠깐을 제외하고는 [[소련 공산당]]의 일당 독재가 이루어졌다. 공산당에 의한 일당 독재, 민주집중제, 계획경제를 기초로 하는 이른바 '마르크스-레닌주의'로 불리는 체제는, 노동자, 농민 및 대중 계층이 지지하는 정당에 의한 독재 체제이며, 표현이나 집회, 결사의 자유는 사실상 없었다. 이 때문에, [[카를 마르크스]]가 주창한 기존의 마르크스주의의 이상과는 크게 동떨어져 일반 노동자·농민에게 있어서는 지배자가 [[로마노프 왕조]]의 [[차르]]를 공산당이 대신한 것뿐으로, 정치적으로는 어떤 해방도 되지 않은 체제가 되었다는 평도 있다. 이 때문에 실질적 최고 지도자인 서기장은 「적색 황제」라고도 불렸다. 특히 스탈린 시대에는 숙청으로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어 스탈린주의 하의 공산주의는 억압적인 체제와 동일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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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소련의 지도자}}
[[파일:Nikita Khruchchev Colour (cropped).jpg|섬네일|right오른쪽|220px|[[니키타 흐루쇼프]] (1961년)]]
[[파일:1977 CPA 4774(Cutted).jpg|섬네일|right오른쪽|220px|[[레오니트 브레즈네프]] (1977년)]]
 
역대 소련의 지도자들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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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지 ==
[[파일:Soviet blocks, Liepaja.jpg|250px|right오른쪽|섬네일|소련 주거정책의 상징인 [[흐루숍카]] 아파트]]
소련 성립 당시 초기의 연당 평균 실업률은 0.7 ~ 1.3% 였으며, [[1950년대]] 후반부터는 0.1% 미만의 실업률을 기록했다. 노동 복지는 당시 자본주의 선진국에 비해 훨씬 높은 수준이었다. 일례로, [[1918년]]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는 세계 최초로 외국인노동자차별금지법, 아동노동금지법, 양성평등고용법 등을 명문화하는 동시에 이러한 법들이 실질적으로 실행되기 위해 국가가 책임을 지고 노력해야 한다는 내용을 명문화 했다. 또한 법적으로 지정된 공휴일과는 별도로 각 산업지마다 약 연평균 25일의 휴일을 주었다. 1917년 11월 11일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는 유럽 최초로 일 8시간, 주 48시간 근무제를 채택했다. 이러한 정책은 당시 일 10시간 내지는 일 14시간 근무제를 채택했던 [[유럽]] 국가들의 노동 정책에 영향을 주기도 했지만, 내전기에서 [[1930년대]] 후반까지 이러한 것들이 소련 내에서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1961년]] 흐루쇼프 집권기에는 주 41시간 근무제로 노동법이 수정되었으며,<ref>《통합노동법》참조</ref> [[1968년]]에는 주 35시간 근로제로 바뀌었다. 또한 해고 과정이 매우 까다로워, 해고율이 매우 낮았다.<ref>《Hoeffding (1958–59)》, page 396</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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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냉전기의 정체]]
[[분류:1922년 설립]]
[[분류:1991년 멸망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