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렌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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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0년]] [[10월 20일]], 내각 비난 결의와 새 총리 임명에 대한 라파예트의 표리 있는 태도에 루이 16세는 격노했고, 헌법에 규정된 자유임면권조차 보장받지 못하자 그를 단념하고, 과감히 반혁명으로 전환하기로 했다.
 
[[파일:Louis le dernier3.jpg|섬네일|left왼쪽|혁명을 강요당하는 루이 16세의 풍자]]
국왕은 즉시 왕당파와 이다 파미엘 다그 주교와 브르트이유 남작을 불러와 왕을 대신하여 외국과의 협상 전권을 비밀리에 부여했다. [[12월 27일]], 성직자에게 혁명법 선서를 강제하게 하는 법률에 서명을 강요당하자 본의가 아닌 왕은 “이런 꼴로 프랑스 왕으로 남는다면, [[메스 (프랑스)|메스 시]]의 왕으로 남는 게 낫다. 하지만, 이제 곧 이것도 끝난다”며 어떤 계획이 있음을 넌지시 내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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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앙투아네트의 주도 하에 계획을 세운 것은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다. 먼저 계획의 중심 인물이 왕비의 애인으로 소문난 스웨덴의 귀족 [[한스 악셀 폰 페르센]]이었다. 그에게 협력한 이는 [[슈아죌 대령]]<ref>루이 15세 시대의 저명한 성직자 슈아죌의 친척. 당시 용기병 대령(Claude Antoine Gabriel, duc de Choiseul - Stainville</ref> 과 왕실학자 고그라는 국왕과 왕비에게 충성을 맹세한 개인과 몇 명의 근위대를 빼고는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던 왕당파와의 연계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파일:Montmédy2.JPG|섬네일|left왼쪽|목적지였던 몬메디 요새]]
국경 지대 군대를 맡고 있던 브이에 후작은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지만, 이 계획에 외국인이 참여하는 것을 처음부터 강하게 우려했다. 페르센은 루이 16세의 신하조차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페르센은 왕비에게 신뢰를 주고자 국왕 일가의 도피 비용으로 천문학적인 비용을 제공했다. 페르센의 다른 애인인 엘레오느르 슈리반이 자금의 일부를 유용하게 해주었고, 이두마차와 신분증을 준비했다. 한편, 마리 앙투아네트의 무리한 주장으로 마차는 8두마차와 서베를린형 대형 사륜마차를 새로 주문하여, 인테리어를 화려하게 맞추고, 아름다운 복장을 준비하는 등의 시간 낭비로 탈출은 당초 예정보다 1개월 이상 늦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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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슈아죌은 40명의 엽기병을 이끌고 샤론 마을 근처의 퐁 드 솔 베일 다리에서 기다리고 있었지만, 국왕의 마차는 도착하지 않았다. 주민들의 눈에 노출되자, 점점 불안해진 슈아죌은 부대를 분산시켜 가도에서 숨겼다. 국왕의 마차는 은식기와 와인 8통, 요리 벽난로 2개 등 필요한 제품을 잔뜩 실어 느린 속도로 가고 있었다. 국왕 일행이 샤론에 도착한 것은 오후 4시였다. 변장한 국왕 일행은 방심하고 있었고, 이곳에서 우아하게 식사를 하고, 화려한 마차와 짐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유유히 사라졌다. 그러나 곧 시내에 왕실 인물들이 통과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퐁 드 솔 베일에서 국왕은 첫 호위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슈아죌의 어리석은 판단으로 길이 엇갈렸다. 다음 [[:w:Sainte-Menehould|생트므누]] 마을에서도 다른 용기병 부대가 기다리기로 했기 때문에 국왕은 2시간 더 가서 그곳에서 만나기를 기대했다.
 
[[파일:Arrest of Louis XVI and his Family, Varennes, 1791.jpg|250px|섬네일|left왼쪽|잡혀서 비탄에 빠진 앙트와네트 왕비]]
그러나 [[:w:Sainte-Menehould|생트므누]]도 의심스러운 부대를 경계한 300명의 지역 무장 국민방위대가 모여있었기 때문에 충돌을 우려한 지휘관 단드윈 대위는 해산을 명령했고, 용기병들의 상당수는 많은 시민과 함께 술에 취해 있었다. 따라서 이곳에서도 국왕은 호위부대와 합류하지 못했다. 그러나 단드윈 대위는 국왕의 마차를 찾아가 다가가서 인사했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것을 더위를 피해 나와 있던 역장인 드루에가 보고 있었다. 드루에는 대위와 용기병들이 마차 안에 있는 하인과 시녀에게 공손하게 인사하는 것을 의아스럽게 생각했다. 샤론으로 왕실 일가가 통과했다는 소문이 흘러 나왔기 때문에, 깜짝 놀란 드루에는 지구 관청에 달려가 서기로부터 압사니어 지폐를 받아들고 인쇄된 초상화를 보면서, 일행 중에 있던 것이 루이 16세였음을 알아본다. 그들은 말을 타고 마차를 서둘러 쫓아가 도로를 우회하여 앞질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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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향 ==
[[파일:LouisXVISanction.jpg|섬네일|left왼쪽|1792년의 풍자화, 레오폴드 2세가 새장에 갖힌 루이 16세에게 "매부여, 서명하는가?"라고 묻고 있다.]]
이 사건은 프랑스 국민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국왕이 외국 군대를 이끌고 공격해 올 예정이었다는 사실은 [[입헌군주제]]의 전제를 근본적으로 뒤흔들 큰 문제였다. 루이 16세는 혁명의 적, 반혁명의 측이었으며, 국가의 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인의 국왕으로 국민의 신뢰는 크게 손상되었다. 그때까지 국왕을 옹호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던 국민이 비교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이후 많은 이들이 좌파로 기울어 혁명은 점점 급진화 되었다. 궁지에 빠진 [[라메트]]와 [[바르나브]]는 국왕이 누군가에게 납치된 것이라고 납치설을 조작했다. 입헌군주제를 성립시키기 위해서는 부이에를 주동자로 하는 거짓 음모가 필요하고, 루이 16세는 피해자였다는 조작을 강변했다. 이 거짓말은 바르나브의 웅변을 통해 어느 정도 성공하여 프랑스 혁명은 입헌군주제와 입법 의회의 성립이라는 시점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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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프랑스 혁명]]
[[분류:1791년 프랑스]]
[[분류:뫼즈주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