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용: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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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루시용의 명칭은 오늘날 [[페르피냥]] 인근의 소규모 요새화된 곳인 루스키노 (Ruscino, Rosceliona, Castel Rossello)에서 유래했으며, 그곳은 갈리아 족장들이 [[한니발]]의 회의 요청으로 만났던 장소였다. 이 지역은 기원전 121년부터 서기 462년까지 로마의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속주의 일부를 형성했으며, 그 후로는 [[셉티메니아 대공국]]의 일부로서 [[서고트족]]의 왕 [[테오도리쿠스 2세]]에게 양도되었다. 그의 후계자인 아말리쿠스는 531년에 클로비스에게 패하며 셉티메니아를 놔두고 [[히스파니아]]로 밀려났다.
 
719년에 [[사라센]]들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 759년에 [[단신왕 피핀]]에게 마침내 패배할 때까지 셉티메니아에서의 정치적 헤게모니를 유지했고, [[나르본 공성전 (752년–59년)|나르본 정복]]을 마친 피핀은 루시용을 점령하러 갔다. 루시용은 760년에 [[카롤루스 왕조]]가 차지했다. 778년 히스파니아 침략 때, [[샤를마뉴]]는 완충 지대로서 [[히스파니아 변경주]]를 세웠고 이곳의 거주민들은 산맥 등지에 정착했다. 그는 [[알안달루스|무어인들이 지배하는 히스파니아]]에서 온 서고트족 난민들에게 이곳의 영토 일부를 부여해주었고 몇몇 수도원들을 세웠다. 792년 사라센들은 다시 프랑스를 침입했지만, [[카탈루냐]]로 영향력을 확장시켜낸 어린 시절의 [[아키텐 왕국|아키텐]]의 왕 [[루도비쿠스 1세 피우스]]의 섭정이던 [[툴루즈 백작령|툴루즈]]의 백작 [[구일렐무스 겔로넨시스|기욤]]이 이들을 격퇴시켰다.
 
그 당시 피우스의 왕국의 각기 다른 영역들은 완전한 사유지 형태의 영지가 되어 갔고, 893년 [[엠푸리에스 백작 수녜르 2세|수녜르 2세]]는 루시용의 첫 세습 [[백작]]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시간이 흘러 속주가 된 곳의 동쪽 부분에서만 확장되었다. [[세르다냐]] (프랑스어:세르다뉴)등의 서부 지역은 900년 초대 백작인 미로 (Miró)가 통치했고, 그의 손자 중 하나인 베르나트 (Bernat)는 중부 지역 또는 [[베잘루]]의 첫 세습 백작이 되었다. 루시용 백작들은 수 세기간 분쟁을 겪던 주변의 대 귀족들에게 맞서 친척이던 [[엠푸리에스 백작령|엠푸리에스]] 백작들과 동맹을 맺었다. [[루시용의 지라르 1세|루시용 백작 지라르 1세]]는 [[툴루즈의 레몽 4세]]를 따라 [[제1차 십자군 전쟁]]에 참여했고, 1099년에 십자군이 들이닥쳤을때, 예루살렘에 발을 들여 놓은 최초의 인물 중 하나였다. 12세기가 시작될 무렵 [[바르셀로나 백작령|바르셀로나]] 백작들의 위신이 커져가기 시작하면서, 루시용 백작들은 그들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것 외에는 선택이 없었다.
 
1111년 바르셀로나 백작 [[라몬 베렝게르 3세]]는 베잘루를 상속받아, 1117년 [[세르다냐]]에 합쳤다. 루시용의 마지막 백작인 [[루시용의 지라르 2세|루시용 백작 지라르 2세]]는 그의 배다른 형제들의 도전을 받았다. 그의 형제들이 자신의 영토를 상속받지 못하기 위해, 지라르 2세는 유언으로 그의 영토를 [[알폰소 2세 데 아라곤|아라곤의 왕 알폰소 2세]]에게 남겼고, 1172년에 차지하였다. [[아라곤 연합왕국|아라곤]]의 지배하에서 경제적, 인구적 성장이 지속되었고, [[페르피냥]]의 항구 중 하나인 [[콜리우르]] (카탈루냐어:코틀리우레/Cotlliure)는 [[지중해]] 무역의 핵심 장소가 되었다.
 
프랑스와 스페인 왕실의 힘의 성장으로 그들 사이의 국경을 형성하고 있던 루시용 지역은 잦은 군사 분쟁 지역이었다. [[코르베유 조약 (1258년)|코르베유 조약]]으로 프랑스의 왕 [[루이 9세]]는 루시용에 대한 통치권과 바르셀로나 백작 작위 주장을 공식적으로 포기하였다.
 
아라곤의 왕 [[하이메 1세]]는 [[무어인]]들에게서 [[발레아레스 제도]]를 차지했고 이 섬들을 루시용과 함께 [[페르피냥]]을 수도로 한 새롭게 세운 [[마요르카 왕국]]에 편입시켰다. 1276년 하이메 1세는 이 왕국을 장차 [[하이메 2세 데 마요르카|하이메 2세]]가 되는 아들에게 주었다. 그 이후 형제인 [[페로 3세]]와의 분쟁을 겪던 하이메 2세는 시칠리아 왕위를 두고 페로 3세와 불만이 있던 프랑스의 [[필리프 3세 (프랑스)|필리프 3세]]를 이용했다. 필리프 3세는 하이메 2세를 지지하며 군대를 일으켜 아라곤으로 진격했지만, 패배하여 1285년 [[페르피냥]]에서 사망했다. 이 분쟁을 이어나가는데 어려움을 겪던 하이메는 그의 형제 페로와 화해하게 되었고 1311년에 하이메는 페르피냥 대성당을 지은 그의 아들 산스 1세 또는 [[산초 1세 데 마요르카|산초 1세]]에게 물려주었고, 그는 1324년에 사망했다. 그의 후임자 [[하이메 3세 데 마요르카|하이메 3세]]는 [[몽펠리에]] 영주권을 [[필리프 6세]]에게 넘기는 걸 거부했고, 아라곤의 왕 [[페로 4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페로 4세는 도움을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전쟁을 선포하여 1344년에 마요르카와 루시용을 점령했다.
 
이 지역은 [[아라곤 연합 왕국]]으로서 다시 합쳐져, 1462년까지 평화를 누렸다. 그 해에 [[후안 2세 (아라곤)|아라곤의 왕 후안 2세]]와 그의 [[카를로스 데 비아나|아들]]이 [[나바라 왕국|나바라 왕위]]를 두고 일어난 분쟁은 반란을 일으킨 후안의 봉신들에게 맞선 그에게 [[루이 11세]]가 지원을 하면서 커져갔다. 루이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는 보증금으로 300,000 크라운을 낸 루시용은 [[샤를 8세]]가 [[가톨릭 군주]]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이사벨 1세]]와 [[아라곤 연합 왕국]]의 [[페르난도 2세 (아라곤)|페르난도 2세]], 이 둘은 두 왕국을 지배한 [[트라스타마라 가문]] 출신의 6촌 관계였다)들과의 합의를 위해 포기한 1493년까지 프랑스군이 차지하고 있었다.
 
이후 벌어진 프랑스와 트라스타마라 가문 간의 전쟁 동안에 루시용인들은 카스티야 방어측과 프랑스 침공측 양쪽으로부터 고통을 받았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1516년에 카스티야와 아라곤 연합 왕국을 손에 넣었고 두 왕국은 처음으로 한 사람의 통치하에 놓이게 되었다. 그 사람이 바로 가톨릭 군주들의 손자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 (스페인 왕으로는 카를로스 1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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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스타마라 통치 기간 카스티야인들로 인한 이 지역의 반감은 카를로스 1세의 영광 속에서 없어졌다. 1542년 페르피냥이 [[프랑스의 도팽]] [[앙리 2세]]에 의해 포위당했을 때, 그곳의 주민들은 카를 5세에게 충성을 했다. 페르피냥은 "페델리시마" (Fedelissima, 가장 충성스러운 도시)이라는 왕실이 내려준 칭호를 얻었다.
 
[[카탈루냐인]]들이 1641년에 스페인 왕국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루이 13세]]가 카탈루냐의 편을 들며 이 분쟁에 끼어들었다. 오래 지속된 전쟁 이후, [[피레네 조약]] (1659년)으로 인해 루시용과 세르다냐의 일부가 프랑스 왕국의 일부로 귀속되었고, 루시용 프로뱅스가 생겨났다.
 
[[루이 14세]]는 새롭게 편입된 영토의 새로운 본국에 대한 정치적 충성 보장과 문화적 정체성을 바꾸기 위한 노력을 50년간 기울였다. 그는 앞에 것은 성공을 거뒀지만 후자는 실패하고 말았다. 중심 도시 페르피냥 밖의 루시용은 19세기 산업화로 프랑스화가 이뤄질때까지 카탈루냐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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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카탈루냐의 역사]]
[[분류:언어권 (권리)]]
[[분류:피레네조리앙탈주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