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납치 사건"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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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인 [[1974년]] [[8월 6일]] 일본 수사당국은 수사 보고서를 발표해 김대중 납치 사건의 범인 중 한 사람으로 김동운 일등서기관을 지목했다. 이에 한국 정부는 [[1974년]] [[8월 14일]]에 그의 혐의에 대해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고 일본 당국에 통보했다. 다음날에는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일본에서 출생·성장한 재일 한국인 [[문세광]]이 박정희 대통령의 암살을 시도했다. 이로 인해 영부인 [[육영수]]가 피격되어 사망했으며, [[시나 에쓰사부로]] [[자유민주당 (일본)|자유민주당]] 부총재가 [[9월 19일]] 일본 정부의 특사로 저격 사건의 진사를 위해 한국을 방문, 박정희 대통령과 회담을 가졌다.
 
[[1974년]] [[10월 25일]]에 일본 당국은 한국 정부의 수사 결과는 납득할 수 없다며 상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한국 정부는 이 요청에 따라 [[1975년]] [[7월 22일]]에 수사결과에 대해 다시 회답하면서, 사건 후 김동운 일등서기관의 직위 해제 이후 수사를 진행했지만 바람직한 결과를 얻을 수 없어 [[1974년|1975년]] [[8월 14일]]에 수사를 중단했으며, 이후 비밀리에 수사를 진행했으나 혐의를 입증할 증거가 없어 불기소 처분을 했으며, 이후 도쿄에서 그의 언동이 품위에 어긋난다고 보여 공무원의 지위를 박탈했다는 요지를 통보했다.
 
1976년 말이나 1977년 초에 중앙정보부에서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KT사건 관여인사 일람표’를 보면, 윤진원에 대해서는 사후관리 방안으로 ‘복직 또는 취직 알선’이라고 한 반면, 김동운에 대해서는 본인이 보직 변경을 희망하므로 상응한 보직을 부여할 것을 건의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김동운은 형식적인 해임 후 바로 복직되었음을 알 수 있다. 김동운은 해직 1년 후에 복직되어 8국 부단장에 임명되었으나 두 달 후 일본이 이 사실을 알고 항의해 와 원남동에 사무실을 얻어 직책도 없이 부이사관급 대우를 받으며 8년 동안 근무하다가 1982년 말 퇴직했다.<ref name=":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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