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투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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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일=서기 14년 8월 19일 (76세)
}}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디비 플리비우스플리우스 아우구스투스'''({{lang|la|IMPERATOR CÆSAR DIVI FILIVS AVGVSTVS}}, [[기원전 63년]] [[9월 23일]] ~ 서기 [[14년]] [[8월 19일]])는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재위 기원전 27년 ~ 서기 14년)이다. 또한 로마 제국의 첫 번째 황조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초대 황제이기도 하다. 본명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Gaius Octavius Thurinus)였으나, 카이사르의 양자로 입적된 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Gaius Julius Caesar Octavianus, {{llang|la|CAIVS IVLIVS CÆSAR OCTAVIANVS}})로 불렸다. 기원전 44년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의 외할머니 [[율리아 카이사리스]]의 남동생이자 자신의 외종조부뻘인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되자, 유언장에 따라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어 그 후계자가 되었다. 기원전 43년, 옥타비아누스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함께 군사 정권인 [[제2차 삼두 정치]]를 열었다. 삼두 정치를 행한 집정관의 한 사람으로서 옥타비아누스는 효과적으로 로마와 [[로마 속주|속주]]<ref>일부 속주는 [[로마 원로원]]이 통치하였다.</ref> 를 지배하였고, 세력을 모아 [[아울루스 히르티우스|히르티우스]]와 [[가이우스 비비우스 판사|판사]]가 죽은 뒤 집정관에 재선되었다. 이후 제2차 삼두 정치도 깨지는데 다른 집정관이었던 레피두스는 유배되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진 뒤 자살하였다.
 
제2차 삼두 정치의 붕괴 후 옥타비아누스는 대외적으로 '''[[로마 공화정]]'''을 부활시키고 정부에 관한 권한은 [[로마 원로원]]에게 주었으나, 사실상 권력은 그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유일한 통치자가 다스리지만 대외적으로는 공화국 형태인 정치 체제의 기틀을 다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껍데기만 공화국인 이 나라는 훗날 [[로마 제국]]으로 불린다. 황제권은 옥타비아누스 이전에 로마를 통치했던 카이사르와 [[술라]]의 [[독재관|독재권]]과는 전혀 달랐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원로원과 시민들로부터 “독재권을 부여받았지만” 거절하였다.<ref name="ccaa 35">CCAA, Erich S. Gruen, ''Augustus and the Making of the Principate'', 35.</ref> 법에 따르면 ‘존엄자’(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받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원로원은 평생 동안 권력을 가지도록 하였고 “호민관 권한”(tribunitia potestas)을 가졌으며 기원전 23년까지 [[집정관]]을 역임하였다.<ref>《로마의 역사: 아우구스투스 시대》 153쪽.</ref> 아우구스투스는 재정적인 성공과 원정에서 얻은 물자, 제국 전체에 걸쳐 맺은 여러 피호 관계(clientela), 군인과 재향 군인의 충성, 원로원에서 부여한 여러 권한과 명예<ref name="eck 3">Eck, 3.</ref> 그리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아 절대적인 권력을 누렸다. 아우구스투스가 가진 로마의 정예병 [[로마 군단]] 다수를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은 원로원에게 군사적인 위협이 되어 원로원의 결정을 억압하였고, 군사적 수단을 사용하여 원로원의 정적들을 제거하여 원로원이 자신에 복종하게끔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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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토니우스와의 첫 번째 분쟁 ====
데키무스 브루투스가 갈리아 키살피나를 포기하기를 거부하자 안토니우스는 [[무티나]]에서 그를 완전 포위하였다.<ref name="rowell, 24">Rowell, 24.</ref> 원로원에서는 안토니우스의 군사적 행동을 각하하는 법안을 서둘러 통과시켰는데 원로원에는 그에게 대적할 군대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이미 군대를 소유하고 있었던 옥타비아누스에게 좋은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ref name="eck 12"/> 또한 키케로는[[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키케로]]는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의 출신에 관하여 조롱하는 것을 비호해 주기도 하였는데 키케로는 “요즘의 젊은이들 중 가장 전통적인 공경심을 지니고 있는 자이다.”라고 말하였다.<ref name="chisholm 29">Chisholm, 29.</ref> 키케로는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에게 “그대는 그대의 이름에 모든 것을 빚지고 있다.”라고 한 말을 들려주었듯이 이것은 안토니우스의 옥타비아누스에 대한 의견의 정면 반박이었다.<ref name="chisholm 30">Chisholm, 30.</ref><ref name="rowell 19 20">Rowell, 19–20.</ref> 과거 대표적인 반(反)카이사르파 원로원 의원인 키케로가 조작화한 이 동맹으로 원로원은 [[기원전 43년]] [[1월 1일]]을 기해 옥타비아누스를 원로원 의원으로 임명하여 그는 전직 집정관들과 같이 투표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ref name="eck 12"/><ref name="rowell 23"/> 추가로, 옥타비아누스는 군대의 사령권을 부여받았는데, 이 권한은 옥타비아누스의 군령을 합법적으로 만들었고 곧 옥타비아누스는 당시 집정관이었던 [[아울루스 히르티우스|히르티우스]], [[가이우스 비비우스 판사 카이트로니아누스|판사]]와 함께 무티나의 포위를 풀러 출병하였다.<ref name="eck 12"/><ref>Syme, 167.</ref>[[기원전 43년]] 4월, 안토니우스군은 [[포룸 갈로룸 전투]]와 [[무티나 전투]]에서 패배하여 안토니우스를 [[갈리아 트란살피나]]로 퇴각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두 집정관이 전사하자 옥타비아누스가 그들의 군대까지 지휘할 수 있는 대군의 단독 사령권을 손에 넣었다.<ref>Syme, 173–174</ref><ref>Scullard, 157.</ref>
 
안토니우스를 격파한 옥타비아누스 대신 [[데키무스 브루투스]]에게 엄청난 사례금을 준 후, 원로원은 집정관의 직속 군단의 사령권을 데키무스 브루투스에게 주려고 하자, 옥타비아누스는 이에 협조하지 않기로 하였다.<ref name="rowell 26 27">Rowell, 26–27.</ref> 심지어, 옥타비아누스는 [[포 계곡]](Po Valley)에 주둔하면서 안토니우스에 대한 모든 공격적인 대응에 협조하는 것을 거절하였다.<ref name="rowell 27">Rowell, 27.</ref> 그해 7월, 옥타비아누스 휘하 [[백인대]]의 사절이 로마로 들어왔고 히르티우스와 판사가 남긴 집정관의 권한을 자신이 전부 받아야 함을 요구하였다.<ref name="chisholm 32 33">Chisholm, 32–33.</ref>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를 공공의 적으로 천명한 것을 무효화하는 포고문을 발표할 것을 요구하였다.<ref name="rowell 27"/> 그러나 이 요구가 거절되자, 그는 4만8천 명의 8개 군단을 이끌고 로마를 행진하였다.<ref name="rowell 27"/> 그는 로마에서 아무런 군사적 반대 세력을 만나지 않았고 [[기원전 43년]] [[8월 19일]] 옥타비아누스는 집정관으로 임명되었고 친척인 [[퀸투스 페디우스]]는 공동 집정관이 되었다.<ref name="eck 14">Eck, 14.</ref><ref name="rowell 28">Rowell, 28.</ref> 한편, 안토니우스는 친(親)카이사르파인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동맹을 구축하였다.<ref>Syme, 176–186.</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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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 혁명 ====
[[파일:Antony with Octavian aureus.jpg|섬네일|오른쪽|300px|[[기원전 41년]]에 [[제2차 삼두 정치]]의 탄생을 축하하며 발행된 로마의 화폐 [[아우레우스]]에 새겨져 있는 안토니우스(왼쪽)와 옥타비아누스(오른쪽)가 새겨져 있다. 모두 “III VIR R P C”의 문구, 즉 “공화정의 조정을 위한 세 사람 가운데 하나”라고 새겨져 있다.<ref>{{웹 인용 | 성 = Sear | 이름 = David R | 제목 = Common Legend Abbreviations On Roman Coins | url = http://www.davidrsear.com/academy/roman_legends.html | 확인날짜 = 2007-08-24 }}</ref>]]
[[파일:S0484.4.jpg|섬네일|300px|[[기원전 18년]]경에 발행된 [[데나리우스]]. 앞면에는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lang|la|CAESAR AVGVSTVS}}), 뒷면에는 신성한 율리우스({{lang|la|DIVVSIVLIVDIVVS IVLIV[S]}})라고 새겨져 있다.]]
[[기원전 43년]] 10월, [[볼로냐]] 근처에서 열린 회담에서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는 군사 독재 체제인 [[제2차 삼두 정치]]를 결성하였다.<ref name="eck 15"/> 이 5년간의 명백한 월권 행위는 비공식적이었던 [[폼페이우스|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크라수스|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제1차 삼두 정치]]와 달리 평민들에게 통과된 법안에 따라 크게 지지받았다.<ref name="eck 15">Eck, 15.</ref><ref name=autogenerated3>Scullard, 163.</ref> 3명의 집정관은 300명의 원로원 의원과 2,000명의 기사 계급 출신을 범법자로 규정하고 추방 명령을 내렸으며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만약 그들이 국외 탈출을 기도하면 그들을 잡아 처형하였다.<ref name="eck 16">Eck, 16.</ref> 세 집정관들은 카이사르의 암살자인 [[마르쿠스 브루투스]], [[가이우스 카시우스|카시우스 롱기누스]]와 곧 싸우기 위해 자신들의 병사들의 월급을 올려주어야 했기 때문에 이들은 이에 크게 자극받아 이 법안을 만들었다.<ref>Scullard, 164.</ref> 3명의 집정관이 암살자들의 유산과 재산을 몰수하는 동안 암살자들에게 내건 현상금은 로마 시민을 크게 고무시켰다.<ref name="eck 16" /> 세 집정관의 이러한 수단은 암살자들과 친분이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을 숙청하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처음에는 추방 명령법을 제정하는 것에 반대하였는데 추방 명령을 받은 자신의 새 조력자, [[키케로]]의 목숨을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ref name="eck 16"/> 그러나 안토니우스의 키케로에 대한 증오는 매우 커서 결국 키케로도 숙청의 희생자가 되었다.<ref name="eck 16"/> 많은 수의 공화파 원로원 의원이 죽었고, 3명의 집정관은 자신의 지지자들로 원로원의 빈자리를 채웠다. [[20세기]]의 역사학자 [[로널드 사임]]은 이를 [[로마 혁명]](Roman revolution)이라 명명하였는데, 이 사건이 구세대 원로원 의원들을 몰아내고 새로운 정치 세력을 구축하여 뒷날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원동력이 되었기 때문이다.<ref name="eck 17">Eck, 17.</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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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Castro Battle of Actium.jpg|섬네일|오른쪽|230px|[[1672년]]에 [[로렌조 카스트로]]가 그린 《악티움 해전》. [[런던]]의 국립 해양 박물관 소장.]]
 
[[기원전 31년]] 초, 아그리파의 함대가 로마군을 수송하여 [[아드리아 해]]를 성공적으로 횡단하였고, 옥타비아누스는 곧 벌어질 큰 전투의 예비 단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ref name="eck 37">Eck, 37.</ref> 한편 아그리파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본대를 그들의 해상 보급 경로에서 차단하고 옥타비아누스는 [[코르푸 섬]] 맞은편에 위치한 본토에 도착, 남쪽으로 진군하였다.<ref name="eck 37"/> 바다와 땅 모두에서 막히자, 안토니우스군의 탈영병은 하루가 머다 하고 계속 옥타비아누스에게 투항하였는데 옥타비아누스군은 전쟁 준비로 휴식이 한창이었기 때문이었다.<ref name="eck 37"/> 안토니우스의 함대는 해상 차단 해제를 기도하기 위해 그리스 서쪽 해안의 [[악티움 만]]으로 나아갔다. 그곳에는 아그리파와 [[가이우스 소시우스]]의 함대가 있었는데 안토니우스의 함대보다 수는 많지만 더 작고 조종하기 더 쉬운 배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기원전 31년]] [[9월 2일]], [[악티움 해전]]이 발발하였다.<ref name="eck 38">Eck, 38.</ref> 안토니우스와 남은 군사들은 근처에 기다리고 있던 클레오파트라의 함대가 막판에 노력한 끝에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ref name="eck 38 39">Eck, 38–39.</ref> 옥타비아누스는 그들을 추격하였고 [[기원전 30년]] [[8월 1일]] 알렉산드리아에서 옥타비아누스가 다시 한 번 승리를 거두자 패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자살하였는데 독사가 클레오파트라를 무는 사이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칼로 몸을 찌르고 클레오파트라의 팔 쪽으로 쓰러졌다.<ref name="eck 39">Eck, 39.</ref>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후계자로서의 위치를 잘 이용하여 크게 성공했었기에 다른 사람들이 이를 활용하는 것이 자신에게도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두 명의 카이사르가 있으나 하나로 족하다.”라는 말을 남겼으며, 훗날의 정치 인생을 위해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아이들은 살려주는 대신에 카이사리온을[[프톨레마이오스 15세 필로파토르 필로메토르 카이사르|카이사리온]]을 죽이도록 명령하였다.<ref>Green, 697.</ref><ref>Scullard, 171.</ref>
 
비록 그의 수단은 잔인했지만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상관이자 신격화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양자인 옥타비아누스를 과소평가하였다. 옥타비아누스에 대한 지지가 약해졌어도 ‘신의 아들’이란아들(Divi filius)’이란 이름으로 자신의 자리를 보전할 수 있었다.<ref name="ccaa 21">CCAA, Walter Eder, ''Augustus and the Power of Tradition'', 21.</ref> 옥타비아누스는 이전에 적들에게 약간의 자비를 베풀어주었고 로마 시민의 호응이 없는 정책을 계속 고수하였으나 악티움 해전 이후 그는 그의 정적들에게 용서를 베풀어 신뢰를 쌓았다.<ref name="eck 49">Eck, 49.</ref>
 
=== 옥타비아누스에서 아우구스투스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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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ugustus Bevilacqua Glyptothek Munich 317.jpg|섬네일|왼쪽|[[시민관]]을 쓴 아우구스투스의 흉상]]
원로원 의원들은 감격하였고, 옥타비아누스에게 “존엄한 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수여하였다. 이와 더불어 아우구스투스의 집 출입구의 위쪽에 [[시민관]](corona civica)을 걸고 출입구의 양쪽 기둥을 월계수 묘목 장식으로 뒤덮었다. 또한 아우구스투스가 황금 방패에 공화정을 복귀시켰다는 사실을 새겨 원로원 의사당에 안치하였다.<ref name="수에토니우스 214">{{서적 인용|저자 = 수에토니우스(박광순 옮김)| 제목 = 풍속으로 본 12인의 로마 황제|출판사=풀빛미디어|연도=1998|쪽=1권 214|언어=한국어|장 = 신군 아우구스투스의 업적록 }}</ref> 이 칭호는 정치적이라기보다는 종교적인 색채가 강하였다.<ref name="eck 49"/> 신의 아들(divi filius, 즉 카이사르의 아들)이라는 지위와 더불어 ‘길조’를 뜻하는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에는 초자연적인 힘이 함축되어 있었는데, 로물루스가 엄숙한 징조(augusto augurio)를 보고 로마를 창건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그는 제2의 창건자로서 또 다른 로물루스로 인정되었다고 볼 수 있었을 것이다.<ref>{{서적 인용 |성 = R. 더들리|이름 = 도널드|제목 = 로마문명사|출판사 = 현대지성사|출판위치 = 서울|쪽 = 181-182|날짜 = 1997년 12월 1일}}</ref> 이를 통해 평화로운 “아우구스투스의 시대”를 내전 등 끔찍한 사건을 겪었던 “옥타비아누스의 시대”와 차별화할 수 있었다.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의 제2의 건국자임을 상징하기 위해서 로마의 건국자인 [[로물루스와 레무스]]에서 따온 “로물루스”라는 칭호도 고려되었지만 로물루스라는 칭호는 [[군주제|왕정]]을 연상시켰기 때문에 결국에는 “아우구스투스”를 선택한다.<ref name=autogenerated1>Eck, 49</ref> 아우구스투스는 또한 자기 자신을 “신군 카이사르의 아들인 임페라토르”(Imperator Caesar divi filius)이라 칭했다.<ref name="eck 50"/> 이는 자신이 신군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양자라는 것과, 승리를 상징하는 “임페라토르”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자신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ref name="eck 50">Eck, 50.</ref> 하지만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받았던 특권인 보라색의 토가를 입을 수 있는 권리, 권위를 상징하는 머리띠와 홀을 쓸 수 있는 권리는 받지 않았다.<ref name="ccaa 13">CCAA, Walter Eder, ''Augustus and the Power of Tradition'', 13.</ref>
 
==== 호민관 특권 ====
[[기원전 23년]] 아우구스투스의 동료 집정관이었던 [[테렌티우스 바로 무레나]](Terentius Varro Murena)가 아우구스투스에 대항하려 한다. 그 방식은 정확하게 전해지고 있지 않으나 무레나는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칼푸르니우스 피소]](Calpurnius Piso)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ref name="ccaa 25">CCAA, Walter Eder, ''Augustus and the Power of Tradition'', 25.</ref><ref name="eck 55">Eck, 55.</ref> 피소는 널리 알려진 공화정 지지자였는데, 아우구스투스는 동료 집정관과 협력하면서 파벌에 관계없이 모든 이들과 협력하여 국정을 운영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ref name="eck 55 56">Eck, 55–56.</ref> 늦봄에 아우구스투스는 자칫하면 죽을 수 있었던 정도로 심하게 병을 앓았고, 사람들은 아우구스투스가 친구인 [[아그리파]]에게 자신의 인장을 넘기고 사위인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황조)|마르켈루스]]에게 병권을 위임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인장과, 관리하고 있던 공금 및 군단 통제권을 동료 집정관인 피소에게 위임했다.<ref name="ccaa 25"/><ref name="eck 56"/> 이러한 행동은 아우구스투스가 사실상의 황제라고 믿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일이었고,<ref name="ccaa 38">CCAA, Erich S. Gruen, ''Augustus and the Making of the Principate'', 38.</ref>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가 제정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의심을 잠시 거둔다.<ref name="ccaa 25"/><ref name="eck 56">Eck, 56.</ref> 아우구스투스는 사유 재산만 자신이 지목한 상속자들에게 수여하려 했다. 당시 로마의 시민들은 여전히 군주정을 좋게 보지 않았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가 만약 권력을 자신이 지명한 후계자에게 물려주려 했다면 반란이 일어났을 것이다.<ref name="ccaa 38 39">CCAA, Erich S. Gruen, ''Augustus and the Making of the Principate'', 38–39.</ref>
 
[[파일:Cameo August BM Gem3577.jpg|섬네일|왼쪽|200px|[[14년|서기 14년]] ~ [[20년]]경에 만들어진 [[시민관]]을 쓴 아우구스투스. [[마노]] 세공으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