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1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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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 기간: 엘리자베스는 뜻하지 않았전 후계자가 아닌 메리의 유일한 후계자였습니다. 메리 여왕은 즉위 초부터 이를 알고 후계자를 가지기 위해 부던한 노력을 했으나 실패하고 결국 사망 전 엘리자베스를 후계자로 지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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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
 
'''엘리자베스 1세'''({{lang|en|Elizabeth I}}, [[1533년]] [[9월 7일]] - [[1603년]] [[3월 24일]])는 [[1558년]] [[11월 17일]]부터 [[1603년]] [[3월 24일]]까지 44년간 [[잉글랜드 왕국]] 및 [[아일랜드 왕국]]을 다스린 [[여왕]]이다. 본명은 '''엘리자베스 튜더'''({{lang|en|Elizabeth Tudor}})이다. 열강들의 위협, 급격한 인플레이션, 종교 전쟁 등으로 혼란스럽기 그지없던 16세기 초반 당시 [[유럽]]의 후진국이었던 조국을잉글랜드를 세계 최대의 제국으로 발전시키는 데 이바지하였다.
 
엘리자베스 1세는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기 때문에 ‘처녀 여왕(The Virgin Queen)’이라 불렸고, 그녀를 마지막으로 [[튜더 왕가]]는 단절되었다. 그녀는 늘 “짐(朕)은 국가와 결혼하였다” 는 말을 공공연하게 입버릇처럼 말해 국민들을 기쁘게 하였다. 이러한 여왕의 독신주의는 어린 시절에 어머니와 계모가 아버지에 의해 죽임을 당한 데서 받은 충격, 그리고 그녀에게 최초로 청혼한 시모어 제독이 정부의 허가없이 공주에게 청혼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한 것이 크게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외모는 타고난 여장부로 미남 같은 분위기의 얼굴을 지닌 미인에 키 170cm를 웃도는 장신이었다.
 
== 즉위 이전의 삶 ==
[[파일:Henry VIII and Anne Boleyn.png|섬네일|왼쪽|엘리자베스는 헨리8세와헨리 8세와 앤 불린 사이에서 태어난 유일한 자녀이다. 어머니 앤 불린은 왕자를 낳지 못했고, 엘리자베스가 태어난 지 3년도 안되어 사형을 당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1533년]] [[9월 7일]] [[그리니치]]에서 [[잉글랜드의 헨리 8세|헨리 8세]]와 그의 제1계비 [[앤 불린]]의 딸로 태어났다. 헨리 8세가 어머니 앤 불린을 간통죄로 고발하자 그녀는 생존 자체가 위험했다. 앤 불린은 3주 만에 타워 그린에서 참수되었다. 엘리자베스는 사생아로 남아 공주의 칭호가 박탈되었고 왕위 계승에서도 제외되었다.<ref name="리더십">{{서적 인용 |저자 = 제임스 맥그리거 번스 |제목 = 역사를 바꾸는 리더십 |id={{ISBN|978-89-20-92226-8}}}}</ref> {{Rp|55}} 어머니가 간통과 반역죄로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참수형을 당한 뒤 엘리자베스는 궁중에서 늘 불안하고 위험하기기만 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복 언니 [[잉글랜드의 메리 1세|메리 공주]]가 항상 그녀를 감시하고 견제하였으며, 부왕인 헨리 8세마저 그녀를 아들이 아닌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홀대했기 때문이다.
[[파일:El bieta I lat 13.jpg|섬네일|왼쪽|200px|엘리자베스 튜더, 1546년 경, 익명의 예술가가 그림. 이 초상화의 꾸밈없는 모습은 이후에 등장하는 화려한 초상과 대비되는 것이다.<ref>"화가는 ... 이름이 알려지지 않지만, 완전한 플랑드르 스타일을 활용하여 앤 불린의 딸을 조용하고 학생처럼 보이는 외모로 묘사했다. 그녀의 옷차림에 달린 장식은 어린 나이를 강조하는 선의 명백함에 비하면 부차적인 것이다. 이것은 이후 초상화에서 나타나는 굉장한 환상과는 매우 큰 대조를 보인다. 이후 초상화에는 창백하고 가면을 쓴 듯한 얼굴에다가 사치스런 장식이 더해져서 모든 인간적인 모습이 사라져 버렸다." 윌리엄 가운트(Gaunt)의 책, 37.</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