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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와서는 영승(甯乘)이란 사람의 조언을 들어 무제의 총애를 받는 왕부인에게 5백 금을 주어 축수했는데, 무제가 이에 대해 묻자 사실대로 말했고 영승은 [[동해군|동해]]도위가 됐다.
 
이후 원수 2년(기원전 123년121년)의 흉노 원정에는 참여하지 못했고, 원수 4년(기원전 121년119년), 표기장군 곽거병과 함께 출진했다. 각각 거느린 기병만 5만 명씩에, 개인 물품을 지고 가는 군마만도 총 14만 필, 보급을 맡은 보병은 수십만 명에 달하는 이 원정은 흉노에게 투항한 조신의 조언을 받아들인 선우가 고비 사막 북쪽에 있으면 한나라 군대가 거기까지는 오지 못할 것이라고 계획한 것을 부수기 위함이었다. 원래는 곽거병이 정양에서 출진해서 선우와 싸우기로 했는데, 포로가 선우가 동쪽에 있다고 해서 곽거병은무제는 곽거병을 동쪽의 대군에서 출진하고 위청이 서쪽의 정양에서 출진했다출진하게 했다. 용감한 병사들도 곽거병에게 배속시켰다. 위청은 낭중령·전장군 이광, 태복·좌장군 공손하, 주작도위·우장군 조이기, 평양공후·후장군 조양<ref>예전 위청의 어머니 위온의 주인인 평양이후 조시와 평양공주 소생으로, 옛 주인의 아들이면서, 당시에는 평양공주가 위청 자신과 재혼했으므로 부인과 전 남편의 소생이기도 하다.</ref>을 거느렸다.
 
흉노의 선우 [[이지사선우]]는 조신의 계책을 따라 한나라 군대가 멀리 행군해 피곤하게 하고자 고비 사막 북쪽으로 물러나서 진을 치고 한나라 군대를 기다렸다. 위청의 군대는 국경 요새를 나와 천 리를 가서 선우의 진을 발견했다. 위청은 병거의 일종인 무강거로 진영을 둥글게 에워싸고 5천 기병을 출진시키니, 흉노도 1만 기병으로 맞섰다. 마침 날이 저물고 자갈을 포함하는 모래바람이 크게 일어 양측이 서로 보지 못하니, 한나라 군대는 양익을 벌려 선우를 포위했다. 선우는 불리하다고 판단해 친위 기병 수백 기만 거느리고 탈출해 서북쪽으로 달아났다.<ref name=":0" /> 양측이 서로 얽혀 싸워 죽인 수효가 비슷했는데, 흉노 포로가 선우가 달아났다고 알려줘 밤에 날랜 기병을 보내 동틀 때까지 200여 리를 추격했으나 선우를 잡지 못했다. 흉노 군은 뿔뿔히 달아났고, 한나라는 흉노 군 만 9천여 명<ref name=":0" /><ref>위장군표기열전에서는 교전 직후의 기록에서는 만여 명, 나중에 국경 요새 너머로 돌아왔을 때의 전황 보고에서는 만 9천여 명을 죽인 것으로 나온다.</ref>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전안산(闐顔山)<ref>동북아역사재단 외국전역주의 주석에 따르면, 지금의 [[몽골|몽골 공화국]] 항가이 산맥 남동쪽에 있는 산 이름이다.</ref>의 조신성(趙信城)<ref>동북아역사재단 외국전역주의 주석에 따르면, 조신이 흉노에 투항해서 쌓은 성이다.</ref>에 이르러 흉노의 군량을 먹었고, 하루 후 남은 군량은 불사르고 돌아왔다.
점령 후에는 흉노의 공격을 막기 위해 허타오 지역에 계속해서 정착촌을 건설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동안 [[삭방자사부|삭방]]과 [[오원군|오원]]을 설치했다. 이 시기에 내몽고 동부지역은 [[선비족]]이 점령했다. 선비는 이후 흉노가 한에게 굴복한 후 이 지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게 된다.
 
그러나 이광과 조이기의 군대를 따로 동쪽으로 보냈는데, 이들은 길라잡이도 없이 행군하다가 흉노와의 교전에는 참여하지도 못하고 고비 사막 남쪽으로 본대가 내려오고서야 합류했다. 이는 무제가 이광이 운수가 사나워서 같이 가면 재미가 없을 것이라고 여겨 밀명을 내렸기 때문인데, 이광과 조이기의 군대를 만나자 이광과 조이기에게 왜 늦었는지를 묻고 무제에게 보고하려 했다. 이광이 대답하지 않자 직접 이광의 막부로 가서 이광을 꾸짖었고, 이광은 치욕을 느껴 자살했다. 나중에 이광의 셋째아들 이감이 위청 때문에 이광이 죽었으므로 원한을 품고 쳐서 상처를 입었으나 숨겼는데, 생질 곽거병이 이를 알고 이감을 활로 쏴 죽였다.<ref>사마천: 《사기》 권109 이장군열전제49</ref>
 
귀환한 후에는 곽거병과 그 부하들만이 포상을 받았고 위청과 위청의 부하들에게는 포상이 없었다. 두 장군의 원정으로 동원한 말 14만 필 중 돌아온 것은 3만 필에 불과했다. 무제가 대사마 관직을 신설해 곽거병을 임명하고 곽거병의 품계와 봉록도 위청과 같게 하자, 위청은 쇠퇴하고 곽거병은 존귀해지고 위청의 친구와 문하 사람들도 위청을 떠나 곽거병에게 가서 벼슬과 작위를 얻었다. 오직 임안(任安)만이 이런 세태를 따르지 않았다. 비록 곽거병이 출세하기 전의 일이지만, 회남왕으로서 반역을 도모한 [[유안 (회남왕)|유안]]은 위청을 조정의 중핵으로 여기고 반역 계획에 위청의 암살을 포함시켰으며, 유안의 심복 오피는 자기 지인 황의의 말을 인용해서 위청을 평했는데, 그에 따르면 사대부를 예의 있게 대하고 은덕이 있으며, 말을 잘 탄다 했으며, 또 알자 조랑의 말을 인용해서 그에 따르면 군령이 분명하고 전쟁에서는 진격에선 앞장서고 후퇴에서는 맨 뒤에 서는 솔선수범하는 장군이며 태후가 하사하는 물건들도 사졸들에게 나눠주니 옛 명장들보다도 낫다고 했다(단 오피가 회남왕의 반역에 반대하고 있어 위청이 있는 한나라 조정에 대해서 우호적으로 평가하고 있기는 하다).<ref>사마천: 《사기》 권118 회남형산열전제58</ref>
 
이 기원전 119년의 전쟁으로 흉노를 고비 사막 북쪽으로 쫓아냈고, 삭방과 영거까지 허타오 지역에 관개하고 개간해 관리와 병졸들로 자리를 잡고 살게 했다. 그러나 무려 10만여 필의 군마를 잃어 흉노가 피폐해졌음에도 흉노와 다시 싸울 수 없었다. 원수 6년(기원전 117년), 곽거병이 병사하자 원정 6년(기원전 111년) 공손하와 조파노를 흉노와 싸우게 하기까지 한나라는 다시 흉노와 싸우지 않았고, 대신 남월·동월·조선·강·서남이에 원정했다.<ref name=":0" /> 이후 흉노 원정에서도 무제는 예전에 위청을 사랑하는 위자부의 동생이라고 중용했듯 당시 총애하는 이부인의 동생 [[이광리]]를 중용했을 뿐, 위청은 다시 전쟁에 참여하는 일 없이 마지막 전쟁 14년 후, 태초 원년(기원전 104년)에 죽었다. 비록 아들 위항·위불의·위등이 모두 기원전 127년에 받은 작위를 위청 생전에 죄를 지어 박탈당하긴 했으나, 위청이 죽기 전까지는 그래도 목숨은 붙어 있었건만, 위청이 죽고 10여 년이 지나 무고의 화가 발생해 누나 무사황후와 그 소생 여태자는 물론이요 큰아들 위항까지 주살되니, 위청은 집안의 멸망까지는 보기 전에 죽은 것이다.
 
분묘(墳墓)는 곽거병의 묘 인근인 무제의 분묘인 [[우부풍|무릉]](茂陵)의 근처에 남아있다.
 
== 가계 ==
 
* 정계=위온
** 위유=공손하
** 위소아=곽중유=진장
*** [[곽거병]]
** 무사황후 [[무사황후|위자부]]=[[전한 무제]]
*** 여태자 [[유거]]
** '''위청'''=[[평양공주 (전한)|평양공주]]
*** [[위항]]
*** [[위불의]]
*** [[위등]]
 
== 각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