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오케팔론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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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티움 제국군은 25,000명으로 추정되나, 하든은 25,000-30,000명으로 버켄하이머는 40,000명으로 추산한다. 비잔티움 제국의 군대에는 마누엘의 친척 헝가리의 [[벨러 3세]]가 보낸 헝가리의 동맹군도 포함되어 있었고, 봉신인 안티오케이아 공국에서 보낸 병력도 있었다.<ref>László Markó. ''Great Honours of the Hungarian State, Magyar Könyvklub Publisher''. Budapest 2000. {{ISBN|963-547-085-1}}. The Hungarian troops were commanded by Ompud, [[Palatine (Kingdom of Hungary)|Count Palatine]] and Leustak, Voivode of [[Transylvania]].</ref> 룸 셀주크군의 군세를 평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비잔티움 군은 계곡을 건너기 위해 몇 개의 부대로 나뉘어 있었다. [[보병]]이 대부분으로 이루어진 선봉대(다른 부대들은 보병과 [[기병]]의 혼성부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본대(동부와 서부의 [[타그마타]]로 이루어져 있었다.)가 선봉의 뒤를 따랐고, 마누엘의 처남 [[안티오케이아의 보두앵]]이 지휘하는 우익(안티오케이아 공국과 다른 서방인 군대로 구성되어 있었다.)의 뒤를 보급품과 공성기들이 따라왔다. 그 다음을 테오도로스 [[마브로조메스]]와 [[요한네스 칸타쿠제노스]]가 지휘하고 황제와 그가 선별한 군사들이 위치한 좌익이 따랐고, 최후방은 경험많은 장군 [[안드로니코스 콘토스테파노스]](Andronikos Kontostephanos) 휘하의 부대가 맡았다.<ref>Choniates, p. 102; Haldon, p. 142.</ref>
 
[[파일:Crusades surprised by turks.jpg|thumb섬네일|left왼쪽|이 그림은 [[구스타브 도레]]가 미리오케팔론의 길에 매복한 투르크군을 보여주고 있다. 이 매복으로 콘야가 함락되어 마누엘의 희망은 무너졌다.]]
 
비잔티움 군 선봉대는 아르슬란의 군대와 마주쳐,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고 돌파에 성공했고, 본대도 마찬가지였다. 아마 룸 셀주크군은 아직 확실하게 전투대형을 편성하지 못했던 것 같다.<ref>Haldon, p. 142.</ref> 선봉과 본대가 계곡을 거의 돌파했을 무렵, 후방은 이제야 막 계곡에 돌입하고 있었다. 이는 룸 셀주크 군으로 하여금 잔여부대들에게 그들이 쳐 놓은 함정에 근접하도록 하게 해 주었다. 고지대에서부터 움직이기 시작한 룸 셀주크 군은 공격을 시작했고, 특히 비잔티움 제국군의 우익에 가해졌다. 우익은 빠른 속도로 분쇄되고 격파 당했으며, 도망치는 병사들은 다른 병사들까지 도망치게 만드는 등 공포가 전염되었다. 우익은 많은 사상자를 입었고, 그들의 사령관 보두앵(Baldwin)은 전사했다.<ref>Choniates, p. 102; Haldon, pp. 142-143.</ref> 룸 셀주크군은 그들의 공격을 보급물자와 공성기에 집중하여 물자를 운송하는 말을 활로 쏴 쓰러트리거나 마차가 움직여야 하는 길을 봉쇄하였다. 좌익부대 역시 룸 셀주크군의 공격으로 심각한 사상자를 입었으며, 좌익의 사령관 얀 칸타코우제노스는 룸 셀주크의 병사 여러 명과 홀로 싸우다가 전사했다.<ref>Choniates, p. 104.</ref> 비잔티움 군의 잔여부대는 그들 앞에서 벌어진 대학살과 후방에 가해진 룸 셀주크 군의 공격으로 패닉상태에 빠졌다. 갑자기 눈을 가릴 정도의 먼지바람이 불어오자, 비잔티움 군은 이 먼지바람이 룸 셀주크 군 역시 혼란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사기와 조직력을 재정비할 수 없었다. 이때 마누엘 황제는 자신감의 위기를 겪는 듯이 했으며,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주저 앉아서 수동적으로 자신과 자신의 군대에게 처해진 운명을 기다리는 듯 했다고 한다.<ref name="Haldon, p. 143">Haldon, p. 143.</ref> 황제는 그의 장교들의 격려로 정신을 차리고, 군율을 회복하고, 군대를 재정비하여 방어진형을 형성하였고, 이렇게 재 정비된 비잔티움 제국군은 보급물자들이 널브러져 걷기가 힘든 상황이 된 계곡의 길을 빠른 속도로 돌파했다. 이렇게 돌파하여, 후방의 부대는 얀(Jhon)과 안드로니코스 안겔로스(Andronikos Angelos), 콘스탄틴 마크로두카스(Constantine Makrodoukas), 그리고 안드로니코스 라파르다스(Andronikos Lapardas)가 지휘하며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은 상태에서 계곡을 돌파하여 요새화된 진영을 구축한 상태에 있던 선봉부대와 본대에 합류할 수 있었다. 안드로니코스 콘토스테파노스가 지휘하던 후방부대도 황제가 지휘하던 부대보다 덜 피해를 입은 상태로 진영에 도착하였다.<ref>Choniates, p. 105.</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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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측은 확실하게 그 피해 정도를 파악하기 힘들기는 해도 일단 많은 피해를 입었다. 비잔티움 군이 전투 후에 퇴각할 때, 그들은 머리와 성기 부분이 잘린 시체들을 볼 수 있었는데 "이는 할례를 한 룸 셀주크 군대와 할례를 안 한 비잔티움 군대를 비교할 수 없도록 룸 셀주크 군대가 사용한 방법으로 양측 모두 많은 병사들이 쓰러졌기 때문에, 어느 쪽이 승리를 했는가는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ref>Choniates, p. 107. Presumably the scalping took place because the Turks wore their hair in a distinctive style.</ref> 비잔티움군의 중요한 공성기들은 탈취당하거나 파괴당했다. 룸 셀주크의 수도 이코니움에 대한 공략을 시도도 못한 비잔티움군은 전역을 계속할 수 없었다. 또 셀주크 술탄 역시 병력을 회복하기 위해 가능한 한 빠른 평화를 원하고 있었기에, 아르슬란은 가브라스(gabras)라는 이름의 사자에게 니사에안(Nisaean)의 전투마와 검을 지참하여 마누엘에게 보내 평화 조약 협상을 하게 하였다.<ref>Choniates, p. 107. The "Gabras" who acted as emissary was most probably Iktiyar ad-Din Hasan ibn Gabras, who was Kilij Arslan's vizier and was of Greek origins. He was a member of the Gabras family that had ruled [[Trebizond]] earlier in the 12th century. There were a number of prominent Greek aristocrats in Seljuk employ, including Manuel's first cousin [[John Tzelepes Komnenos]].</ref> 협상의 결과로 비잔티움군은 방해를 받지 않고 퇴각할 수 있었고, 마누엘 황제는 요새를 파괴하고, 비잔티움과 룸 셀주크의 국경에 있는 [[도릴라리움 전투|도릴라리움]](Dorylaeum)과 수블라이움(Sublaeum)의 요새의 수비병들을 철수시켰다.<ref>Angold, pp. 192-193.</ref> 그러나 킬리지 아르슬란가 신의를 지키겠다고 단언했음에도 불구하고, 퇴각을 하던 비잔티움 군세는 룸 셀주크의 킬리지 아르슬란이 제대로 제어를 하지 못하던 [[투르코만]](Turcoman) 부족의 습격으로 고통 받았다. 이는 술탄이 1162년에 체결된 조약을 지키는 데 실패했던 것처럼 마누엘 황제로 하여금 그들이 맺은 조약을 이행하지 않는 핑계를 만들어 주었다. 그러므로 마누엘 황제는 덜 중요한 수블라에움의 요새는 헐어버리는 대신, 도릴라에움의 요새는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ref>Treadgold, p. 649.</ref>
 
[[파일:South-eastern Europe c. 1180.jpg|thumb섬네일|right오른쪽|250px|비잔티움 제국의 지도에서 미리오케팔론의 위치를 표시하였다]]
 
마누엘 황제는 자신의 처지를 [[만지케르트]]의 패배에 비교하며, 콘스탄티노플에 자신의 운명을 [[로마누스 4세|로마누스 디오게네스]](Romanos Diogenes)의 운명과 연결 짓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같은 편지에서 마누엘 황제는 "훌륭한 조약이 술탄과 맺어졌다. 그는 적들을 두렵게 하기 위해서 그들의 눈앞에서 바람에 나부끼는 자신의 군기 앞에서 조약을 채결한 것을 자랑하였다"라고 기술하였다.<ref>Choniates, p. 108.</ref> 일반적으로 술탄이 먼저 마누엘에게 사자를 보내 평화협정을 제안했으며, 반대가 아니라는 것은 확실시 되고 있다. 이는 킬리지 아르슬란이 확실히 우위에서 협상을 진행했음에도 불구하고, 비잔티움 제국군을 확실하게 격파할 능력이 없었다는 것을 결론을 내리게 한다. 킬리지 아르슬란이 다시 전투를 하길 꺼려했던 것은 그의 비정규 군세 대부분이 전투를 계속하는 것보다 약탈을 계속하는 데에 흥미가 있었고 결국 군대를 이탈하여 룸 셀주크 군대가 많이 약화되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ref>Finlay, p. 195.</ref> 미리오케팔론은 비록 비잔티움 제국의 큰 패배이기는 했지만, 비잔티움 제국군의 군사력에 실질적인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다. 이는 다음해에 메안데르 강가에서 벌어진 [[히엘리온과 레이모케이르 전투]](Hyelion and Leimocheir)에서 룸 셀주크군을 격파한 비잔티움 군의 고귀한 승리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ref>Ironically, this battle was a reverse of Myriokephalon with a Seljuk army blundering into a classic ambush laid by the Byzantine general John Vatatzes.</ref> 마누엘 황제는 소규모 전투에서 셀주크 군과 교전하여 승리를 거두었고, 1179년 좀 더 유리한 조약을 맺을 수 있었다.<ref>Angold, p. 193; Magdalino, pp. 99-100.</ref> 그러나 만지케르트와 같이 미리오케팔론은 중요한 사건으로 아나톨리아에 있던 두 세력 간의 힘의 균형을 서서히 바꾸어서, 마누엘 황제는 룸 셀주크에 대하여 공세적인 대규모 전략적 원정을 계획하지 못하고, 계속 수세적인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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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1176년 분쟁]]
[[분류:1176년 비잔티움 제국]]
[[분류:코니아주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