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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방응모]] 사후 몰락한 [[조선일보]]를 다시 일으켰다. [[한독당]]원에 [[김구]]의 노선을 추종한 [[방응모]]는 야당인사로 분류되었고, [[한국전쟁]]으로 납북되어 사망하면서 조선일보는 몰락했으나 그는 내분을 수습하고 다시 회사를 일으켜 세웠다.
[[1955년|1975년]] 방일영장학회를 조직, 고학생들의 장학금을 지급하였다.
 
=== 조선일보 회장 추대 이후 ===
1964년 11월15일 회장에 취임하는 동시에 동생인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을 [[조선일보]] 대표이사 겸 사장으로 임명해 일선경영을 맡겼으며, 1970년까지도 실질적인 경영권을 행사했다. 방우영은 1970년부터 실질적인 경영권을 넘겨받아 조선일보의 성장기를 주도하게 된다. [[1993년]] 3월에는 지병인 당뇨로 인해 조선일보 이사 고문직까지 사퇴하며 경영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그는 조선일보 재직기간중이던 [[1980년]]대 조선일보를 급팽창시켜 발행유가부수 1위의 신문으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이같은 성장과정은 80년 [[광주학살5·18 광주 민주화 운동|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전두환 군사정권과의 유착이 큰 밑바탕이 됐고, [[코리아나 호텔]] 특혜의혹 등 적잖은 시비를 낳기도 했다.<ref>{{뉴스 인용|제목 = '혼맥'을 알면 '조·중·동의 대한민국'이 보인다|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2&aid=0001952196|출판사 = 프레시안|저자 = 신학림|쪽 = |날짜 = 2009-07-02|확인날짜 = 2010-01-21}}</ref> 또한 대통령선거 등 주요한 정치전환기마다 강한 정파성을 드러내 '[[안티조선]]' 운동을 자초하기도 했으며 지금도 '족벌언론' 논란에 휘말려있는 상태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02&aid=0000005861& 방일영 조선일보 전 고문 사망 - 숙환으로 8일 새벽, '밤의 대통령'으로 불리며 조선일보 팽창 ]</ref>
 
[[1975년]] 방일영의 사재(私財) 출연금으로 '방일영장학회'를 법인으로 발족했다. 방일영은 방우영과 형제가 보유한 15%를 재단의 기금으로 새로 출연하고, 20년간 운영되어 왔던 '방일영장학회'의 장학기금 15억 여원을 합해 그 해 11월 비영리 공익법인으로 방일영장학회(재단)을 설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