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울스턴크래프트: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TedBot (토론 | 기여)
잔글 봇: 틀 이름 및 스타일 정리
28번째 줄:
[[파일:Jacques Bertaux - Prise du palais des Tuileries - 1793.jpg|섬네일|오른쪽|alt=Smoke is billowing throughout the top two-thirds of the picture, dead guards are scattered in the foreground, and a battle, with hand-to-hand combat and one horse is taking place in the bottom right.|프랑스 혁명의 폭력적 확산을 상징하는 [[8월 10일 사건|8월 10일]] [[튈르리 궁]] 공격사건.]]
 
울스턴크래프트는 1792년 12월 파리를 떠났다가 [[루이 16세의 처형|루이 16세가 처형]]되기 한 달 전에 돌아왔다. 영국과 프랑스는 서로 전쟁을 벌이기 직전까지 가고 있었기에, 다들 그에게 프랑스로 가지 말라고 말렸다.<ref>Furniss 64.</ref> 프랑스는 아수라장이었다. 그는 [[헬렌 마리아 윌리엄스]]를 비롯한 다른 영국인들과 함께 당시 파리 내부의 국외거주자 모임에 참석했다.<ref>Todd, 214–15; Tomalin, 156–82; Wardle, 179–84.</ref> 1792년 12월 26일, 울스턴크래프트는 전 국왕 [[루이 16세]]가 [[국민의회 (프랑스 혁명)|국민의회]]에 끌려가는 것을 목격했다. 죄수의 신분으로 마차에 실려 죽음을 향해 끌려가는 루이가 상상했던 것보다 존엄한 모습을 보여줬기에 울스턴크래프트는 다소 놀랐다. 파리 체류 기간 동안 울스턴크래프트는 과격파 [[자코뱅]]보다는 온건파 [[지롱드]]와 주로 교유했다.<ref name="Furniss 65">Furniss 65.</ref>
 
1793년 2월, 프랑스가 영국에 선전포고했고, 울스턴크래프트는 프랑스를 떠나 [[스위스]]로 가려 했으나 허가를 받지 못했다.<ref name="Furniss 68">Furniss 68.</ref> 1793년 3월, 자코뱅이 주도하는 [[공안위원회 (프랑스 혁명)|공안위원회]]가 프랑스의 권력을 장악했고, 전체주의 정권을 수립해 프랑스를 [[총력전]] 체제로 끌고갔다. 자연히 프랑스에 체류중인 외국인들의 처지는 착잡해졌다.<ref name="Furniss 66">Furniss 66.</ref> 프랑스의 모든 외국인들은 경찰의 감시 하에 놓였으며, 거주권을 허락받기 위해서는 그들이 프랑스 공화국에 충성한다는 것을 증명해줄 수 있는 프랑스 남성이 6개조 보증서를 써 주어야 했다. 4월 12일에는 모든 외국인들의 프랑스 출국이 금지되었다.<ref name="Furniss 67">Furniss 67.</ref> 울스턴크래프트는 혁명 동조자였음에도 생활이 매우 불편해졌다.<ref name="Furniss 67"/>
69번째 줄:
 
==== 여성의 권리 옹호 ====
{{main본문|여성의 권리 옹호}}
『[[여성의 권리 옹호]]』는 최초의 여성주의 철학서로 평가받는 책이다. 이 책에서 울스턴크래프트는 여성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에 걸맞는 교육을 받을 의무가 있으며 그리함으로써 자신의 지위를 재정의할 수 있다고 논했다. 또한 여성은 국가의 필수적 요소인데, 왜냐하면 국가의 후세대인 아동을 양육하는 것이 그들이고 또한 그들은 남편의 "아내"로 머무르지 않고 "동지"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ref>Wollstonecraft, ''Vindications'', 192.</ref> 여성을 사회의 장식품 또는 결혼이라는 거래를 통해 주고받는 재산으로 파악하지 않고, 울스턴크래프트는 여성 역시 남성과 동등한 기본권을 가지는 인간이라고 주장했다. 『여성의 권리 옹호』 중 많은 부분이 [[제임스 포다이스]]나 [[존 그레고리]] 같은 [[규범서]] 작가들, 그리고 [[장자크 루소]] 같은 여성의 교육권을 부정한 교육철학자들에 대한 분노어린 독설로 가득하다. 루소는 『[[에밀]]』에서 여성의 교육은 남성의 쾌락을 위해서만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ref>Kelly, 123, 126; Taylor, 14–15; Sapiro, 27–28, 13–31, 243–44.</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