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베르그손: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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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 Bergson.jpg
|그림설명 ={{노벨상 딱지}}
|이름 = 앙리-루이 베르그송베르그손 (Henri-Louis Bergson)
|출생일 = {{출생일|1859|10|18}}
|출생지 = [[프랑스]] [[파리 (프랑스)|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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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루이 베르그송베르그손'''(Henri-Louis Bergson, [[1859년]] [[10월 18일]] ~ [[1941년]] [[1월 4일]])은 프랑스의 철학자이다.
 
== 생애 ==
1859년 10월 18일 [[프랑스]] [[파리 (프랑스)|파리]]에서 [[폴란드]]계 [[유대인]] 아버지와 [[영국]] 국적의 [[아일랜드]]계 유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ref>이 문단은 앙리 베르크손 지음, 최화 옮김,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아카넷 (2001), 367~374쪽에 수록된 〈베르크손 연보〉를 바탕으로 작성되었다.</ref> 1868년에 [[:fr:Lycée_Condorcet|콩도르세 중등학교]](Lycée Condorcet, 입학 당시에는 보나파르트 중등학교)에 입학하여 수학하였다. 베르그손은 어린 시절부터 학업에 뛰어난 자질을 보였는데, 전국 학력경시대회에서 라틴어, 영어, 기하학, 그리스어, 불작문, 수학, 역사 등 다양한 분야의 상을 휩쓸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베르그손이 1877년 전국 학력경시대회의 수학 부문에 제출한 답안은 《수학 연보》(''Nouvelles annales mathématiques'')에 소개되기도 했다.
 
1878년에는 고등사범학교(École normale supérieure)에 입학하였고, 1881년에는 고등사범학교 졸업과 함께 철학 교수자격시험(agrégation)에 합격하였다. 같은 해 [[:fr:Lycée_Henri-Bergson_(Angers)|앙제 중등학교]](Lycée Angers, 현재 앙리-베르그송베르그손 중등학교Lycée Henri-Bergson로 개칭)의 교수가 되었고, 이후에도 여러 군데에서 중등학교 교수로 일했다. [[소르본 대학교]]의 교수직에 두 번 지원해서 두 번 모두 실패하였지만, 1898년에 고등사범학교의 전임강사 자리를 얻었고, 1900년에는 마침내 [[콜레주 드 프랑스]]의 그리스-라틴 철학 담당 교수로 취임하였다. 1904년에는 콜레주 드 프랑스의 현대철학 담당 교수로 자리를 옮겨 1921년 은퇴할 때까지 이 곳에서 강의와 연구를 병행하였다.
 
1914년에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으로 선출되었고, 같은 해 베르그손의 저작 대부분이 [[로마 교황청|교황청]]에서 [[금서]]로 지정되었다. 1928년에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1930년에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레지옹 도뇌르]] 1등 훈장(grand croix)을 수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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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사회에 관한 그의 관점 또한 '시간', '변화', '운동' 에 중점을 두고 재해석한 것이다. 종교에는 고정적인 제도, 고로 폐쇄적이게 되는 종교와 시대에 따라 변하는 개방적 종교가 있다고 하여 후자가 필연적으로 살아남게 된다는 것을 역설하였다. 도덕에 관한 관점 또한 기존의 고정되어 있는 전통적 도덕의 체계보다 시시각각 움직이고 계속 변화되어 가는 원칙을 가진 유기체적 도덕의 우수성을 옹호하였다. 사회에 대한 관점에서도 그는 고정되고 닫힌 폐쇄된 사회보다는 변화되고 움직이는 '열린 사회'를 주장하였다. 칼 포퍼는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열린 사회'라는 용어가 그에게서 빌려온 것임을 밝히기도 했다.
 
이 사회철학은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 이라는 그의 마지막 주저에 서술 되어 있는데, 베르그송은베르그손은 이 마지막 저서를 1932년, 그의 나이 73세때 출판
하였다. 이때는 이미 <창조적 진화>가 출판된 지 25년이나 지난 후였는데, 이 책이 출판된 후 사람들은 이미 70대인 이 노철학자의 사유의 유연함이 청년같음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 영향 ==
플라톤 이후 2000년 넘게 이어져왔던 물질들의 "정지"를 전제로 한 존재론 위주의 철학적 담론을, 베르그송은베르그손은 당대의 최첨단의 과학 지식들을 흡수하려고 노력하여(그는 그의 저서 '물질과 기억'의 단 3페이지를 쓰기 위하여 병리학을 5년동안 공부하기도 하였다) "운동"으로 전환시켜, 이후의 철학 사조들([[화이트헤드]], [[들뢰즈]] 등)의 사상적 기원이 되고 있다는 평가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학문을 성립시키기 위해서 운동을 되도록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학문이라는 것은 일종의 분석작업이고, '분석'이 가능하려면 [[동일률]](자기동일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학문이 탐구할 대상은, 분석하기 이전과 이후가 동일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탐구대상이 분석 과정중에 변화한다면, 분석의 의미 자체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만약 [[헤라클레이토스]]가 주장한, 모든것은 매순간 계속 변하고 있고, 한순간도 정지가 없다는 전제를 받아들이면 학문은 불가능하다. 정지는 고대인들의 상식적인 경험에도 비추어 보아도 올바르게 보였고, 학문을 위해서도 필요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