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롤루스 대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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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8년]] 피핀이 죽자 프랑크 왕국의 오랜 관습에 따라 왕국은 그의 두 아들에게 분할되었다. [[피핀 3세]]의 죽음을 계기로 [[아키텐]]이 독립을 시도하였으나 카롤루스는 재빨리 군사를 파견하여 아키텐을 정벌하고 공작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러나 형제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다. 카를로만 2세는 사망했고 결국 카롤루스가 승리했으며 자기를 배신하고 카를로만의 편을 든 이탈리아 북부의 [[롬바르드 왕국]]을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동시에 [[데시데리우스]]의 딸인 왕비 [[데시데리아]]를 폐위시켜 수녀원에 보냈다. [[774년]] 초부터 롬바르드의 수도인 파비아 포위 공격이 아직 진행되고 있는 동안 카롤루스는 [[로마 시|로마]]로 가서 교황과 함께 774년 [[4월]]의 [[부활절]]을 축하하데 참석하고, [[롬바르드 왕국]]령의 대부분을 [[교황령]]으로 이양하겠다는 아버지의 약속을 [[성 베드로 성당]]에서 재확인시켜 주었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넓혀준 교황령의 영토는 얼마되지 않았으며, 일부로마 지역을인근지역을 제외한 롬바르드 왕국령에 대한 통치권은 자신이 차지했다. 바티칸에서는교황청에서는 영토가 적다고 반발하였으나 곧 무마되었다.
 
==== 작센 원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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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 기록 ==
=== 탄생일과 탄생장소 ===
일반적으로 카롤루스의 탄생년은 [[740년]] 또는 [[742년]]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것이 아니라는다른 설도 있다. 742년에 태어났다는 기록은 그가 죽은 후에 기록되었다. 또 다른 설은 [[747년]] [[4월 2일]]에 태어났다는 것인데 공교롭게도 그 날이 [[부활절]]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논란의 여지가 있었으나 그 날이 부활절이란 기록이 전혀 없으며 그저 카롤루스를 기리기 위해 생겨난 것이라는 추측이 뒤따르고 있을 뿐이다.
 
어떤 논평자들은 그가 [[748년]]에 태어났다는 기록에 중심을 두고 있기도 한다. 하지만 오늘날 카롤루스의 정확한 탄생을 계산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나마 가장 신빙성 있는 추측이 [[747년 4월 1일]] 또는 15일 이후 아니면 [[748년]] [[4월 1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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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제는 아무리 그 옷이 멋지고 화려하더라도 외국의상이라면 무조건 경멸했다. 또 그런 옷들을 전리품으로 수집하는 것도 금지했다. 대제가 외국의상을 입은 적은 딱 두 번인데, 한 번은 교황 [[아두리아누스]]의 요청으로, 또 한 번은 아두리아누스 교황의 다음인 교황 [[교황 레오 3세|레오]]를 기쁘게 하려고 로마양식의 신발, 튜닉과 망토를 입었다.}}
 
카롤루스는 꼭 필요한 때가 아니면 화려한 의상을 입지 않았는데, 그가 그러한 의상을 입을 때는 연회나 사절단 환영회 같은 행사가 있을 때뿐이었다. 그 날에는 자수와 보석이 박힌 옷과 신발신발을 입고신고 황금색 단추가 달린 망토를 걸치고 왕관을 썼는데, 아인하르트가 언급했듯이 그는 그런 의상을 싫어했다. 평소 카롤루스는 평범한 사람들처럼 수수한 의상을 입었다고 한다.
 
== 12명의 성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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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롤링거 왕조]]
* [[카롤링거 제국]]
*[[카롤링거 르네상스]]
* [[세례]]
* [[피핀 3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