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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에서의 일본인 대장 암살이 실패하자, 오성륜은 [[모스크바]]로 건너가 [[동방노력자공산대학|동방노동자공산주의대학]]에서 공부하였는데 이는 [[무정부주의]]에서 [[공산주의]]로 이념을 바꾸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1923년]]에는 [[고려공산당]]의 집행부대 성격을 가진 [[적기단]]에 가담했으며, 이듬해에는 중국 [[중국 국민당|국민당]]과 [[중국 공산당]]간의 [[국공합작|좌우합작]]으로 운영되던 [[황푸군관학교]]에서 교관으로 활동한다. 하지만 [[1927년]] 중국공산당의 [[광저우]]점령사건인 [[광둥코뮌]] 가담으로 [[광둥]]의 하이루펑 [[소비에트]]로 활동지역을 옮겼다. 이듬해 하이루펑 소비에트가 붕괴되면서 [[1929년]]에서 [[1930년]] 사이에 [[만주]]의 [[지린성]] 판스현에서 활동했다.이는 중국 공산당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 조선사람인 오성륜의 중국 공산당에서의 활동은 [[1930년]] [[코민테른]]에서 중국공산당은 [[만주]]내 [[조선인]] [[공산주의]] 단체들을 흡수하라고 지시,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이 중국 공산당에 가입한 시대상황 때문이었다.
 
[[1931년]] 오성륜은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 판스현위의 무장조직인 적위대(赤衛隊)를 결성하였는데, 후에 [[동북항일연군]]의 모태가 되었다. 이때 그와 만주성위의 서기 나등현은 [[일본 제국|일제]]를 적으로 규정해야 한다고 보았으나, 중국 공산당에서 이를 인정하지 않음에 따라 중국인 지주들을 상대로 [[계급혁명]]을 벌였다. 하지만, 지주들의 저항으로 계급혁명은 실패했고, 오성륜은 적위대를 노농반일의용군으로 개칭했다. 또한 일제에 대항하는 비적인 상점대와 연합했으나,내부에서 항의가 있어서 조직이 분열되고 말았다. 이에 대해 만주성위에서는 [[중국인]]인 양징우를양징위를 대표로 파견, 지도기관 개조를 시작한다.([[1932년]] [[11월]]). 양징우는양징위는 의용군과 상점대의 분리를 항일운동 지속을 위해 거부하는 오성륜을 판스현 당대회에서 비판과 함께 반석현위 서기직에서 해임시켰다.
 
중국공산당에서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로서의 뜻을 펼칠 수 없게 되자, 그는 [[1934년]] [[11월 7일]]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의 제2사 정치부 주임으로 활동하였다. 독북인민혁명군은 [[남만주]]의 공산주의계 무장단체를 통합한 연합무장단체이다. [[1935년]] 코민테른에서 계급혁명노선에서 반제국주의 인민전선전술로 활동방향을 바꾸면서 재만한인조국광복회를 [[1936년]] 6월에 결성한다. 또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군수처장으로 승진하였으나, 동북항일연군은 일본의 겨울진압전과 집단수용시설인 [[집단부락]] 건설로 인한 [[민중]]들의 지원단절로 세력이 약해졌으며 오성륜 자신도 포위당한다. 결국 [[1941년]] 1월 항복하였으며 일본에 협력하고 말았다. 그래서 일본이 패망한후 [[팔로군]]에게 처형당한 것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1947년]] [[네이멍구]] 자치구에서 병사하였다. 오성륜의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로서의 업적이 [[김일성]]의 업적으로 둔갑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이를 근거로 김일성이 조국광복회를 결성했다고 기록해 왔다는 주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