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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나 [[고려사]]의 기록에 따르면, 견훤은 무진주를 점령한 이후, 한동안 스스로를 직접적으로 왕이라 칭하지 않고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지절도독 전무공등주군사 행전주자사 겸 어사중승상주국 한남군개국공 식읍이천호(新羅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持節都督 全武公等州軍事 行全州刺史 兼御史中丞上柱國 漢南郡開國公 食邑二千戶)라 칭하였다. 견훤은 900년에 이르러서야 국호를 정하고 왕을 칭하였다.
 
또한, 후백제는 [[신라]]가 쓰던 관직명을 거의 그대로대부분 사용하였다. 후백제의 관리였던 [[능환]]은 신라 관계의 6등위인 아찬(阿飡) 벼슬을 지냈던 것과 후백제의 장수였던 [[상귀]] 역시 신라 제 7관등에 속하는 일길찬(一吉飡) 벼슬을 지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루 미루어 보아 후백제는 신라와 매우 흡사한 사회 구조와 관직 체계를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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