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시메옹 샤르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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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밥티스트 시메옹 샤르댕 (Jean-Baptiste Siméon Chardin''' [[1699년]] [[11월 2일]] - [[1779년]] [[12월 6일]]) 18세기 [[프랑스]]의 화가
 
== 생애 ==
샤르댕은 1699년 파리에서 목수인 아버지 장과 어머니 잔 프랑스와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세례명 시메옹, 간간히 장-밥티스트로 작품에 서명). 그는 일찍부터 그림그리기에 관심과 재주을 보여 그의 아버지는 아들을 미술학원 상-뤽 아카데미 (''Saint-Luc Académie'')에 보낸다. 시메옹은 여기서 색체를 섞고 칠하는 나름대로의 고유한 기술을 익히게 되며, 이 화법은 후에 샤르댕의 작품에서 역력히 그 흔적을 남기게 된다. 미술학원에서 장인 자격증을 취득한 후, 샤르댕은 아직 화가로서의 자신의 부족한 점을 깨닫고 여러 군데 사설학원의 실습과정에 등록하여 화법을 개선하는데 노력한다.
 
[[1728년]] 젊은 화가들의 전시회에 샤르댕은 여러 작품을 출품하여 화단의 주목을 받게되며, 이를 계기로 같은 해 [[9월 25일]] [[프랑스 아카데미]](미술분과)에 자신의 작품을 선을 보여 곧바로 분과회원으로 가입된다. 회원가입에서 샤르댕은 '''동물과 과실의 기교화가'''라는 별명을 얻게 되지만, 그의 작품은 실제로 이 지칭과는 조금 동떨어져 있다.
 
== 작품경향과 영향 ==
[[세잔]]이 말년에 인상주의 화풍에서 점차 멀어지면서 중점적으로 정물화를 (약 200여점) 그린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물론 세잔은 아직 [[인상주의]] 화가 [[마네]]와 [[사실주의]] 화가 [[쿠르베]]의 여향 밑에서 세잔 고유의 정물화 세계를 발견하였지만, 역사적으로 세잔의 정물화는 샤르댕의 정물화 없이는 생겨날 수 없었다. 1860년에 에콜 프랑스 (L'Ecole française)에 총 41점의 샤르댕의 [[정물화]]와 [[인물화]]가 전시되므로서 처음으로 샤르댕의 작품세계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여기에서 19세기 중반의 프랑스 화가들 [[프랑스와 보뱅]], [[필리프 루소]], [[앙트완 볼롱]] 등이 적지 않은 감화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63년 [[공꾸르 형제]]가 예술잡지 가제트에 샤르댕에 관해 논문을 발표하므로서 샤르댕은 19세기 말에 프랑스 화단에서 재발견 및 평가 되었으며, 특히 [[루브르 박물관]]에서 샤르댕의 작품 구입에 결정적인 동기를 주었다.
 
== 대표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