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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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중국과 일본선교사로 활동한활동하던 미국 북감리교회(미감리회) 소속의 [[맥클레이로버트 새뮤얼 매클레이]](R.Robert S. Maclay) 선교사가 [[1884년]] 6월 24일 내한하여 최초로 전래되었다.<ref>[http://www.kmc.or.kr] 기독교대한감리회 공식 홈페이지</ref>. 그는 조선 [[대한제국 고종|고종]]황제로부터 의료 및 교육사업의 허가를 받았다. 다음해 1885년 4월 5일 미국 북감리교회 소속의 목사 [[헨리 아펜젤러]](H.Henry G. Apenzeller)와 의사 [[스크랜튼윌리엄 스크랜턴]](Dr. William B. Scranton), 여선교사 [[메리 스크랜튼]](의사Mr. Mary F. Scranton, 윌리엄 스크랜톤의 어머니)에 의해 본격화되었다. 미국 남감리교회(미남감리회)에서는남감리교회에서는 1895년 10월 [[동양 선교를 주관하던 헨드릭스]] 감독(Bishop E.Eugene R. Hendrix)과 [[리이드]] 박사(Dr.C.F. Clarence Frederick Reid)가 내한하여 전도를 시작하였다. 당시에는 북감리회를 '''미리미교회'''라고 했고, 남감리회를 '''감리회'''라고 불렀다.<ref>죠션그리스도인회보(영인본), 한국감리교회사학회, 1986</ref>
 
최초 전래시는 미국 북부의 감리회와 미국 남부의 감리회에서 온 선교사들이 별도로 [[연회]]<ref>감리교회의 감독이 자치권을 지닌 독립적 선교 구역을 의미하며, 천주교의 대교구에 대응한다. 연회는 이름과 같이 1년에 한번 연회를 가져 교회 내의 업무사항을 처리하며, 감독(또는 연회장)이 임명되어 연회 내의 지방회와 그 구성 교회를 돌보고, 목사를 안수한다.</ref>를 구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1930년]] 12월 2일 미국의 남북감리교회의 통합보다 앞서 양측의 감리교회의 통합 전권을 위임받아 조선의 두 연회가 통합하여 "기독교 조선 감리회"가 창설되었다.
 
이후 일본의 강요로 [[1943년]] '일본기독교조선감리교단'이 창설된 후 [[조선기독교단1945년]] [[일본기독교조선교단]]으로 강제 통합당한 감리교회는, 해방후해방 후 다시 분리되어 새로 교단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재건파와 복흥파로 분리되는 등 홍역을 앓았다. 그러나 그 이후 다시 통합되어 [[1949년]] 현재의 이름이 채택되었다. 이후 [[1971년]] 경기연회 사건으로 총리원과 총회(갱신)측으로 분리되기도 하였으나[http://100.naver.com/100.nhn?docid=759439], 이후 재통합돼 감리교단은 현재 대한민국 개신교 교파중에서 유일하게 교파 분열을 겪지 않은 교회이다. 다만 2008년 감독회장 선거로 시작된 [[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회장 선출 논쟁]]이 있었으나 2013년 현재 전용재 목사가 감독회장에 당선됨으로써 일단락됐다. 현재까지 감독 선출과 교회 운영은 감리회 본부와 총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1901년]] [[김창식]], [[김기범 (목회자)|김기범]]이김기범이 한국 개신교 최초의 목사로 안수받았다. 또한 1930년대에 여성 선교사들의 목사 안수를 시작하였고, [[1955년]] 한국 개신교 역사상 최초로 [[전밀라]], [[명화용]] 두 여성이 목사안수를 받았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에 가입되어 있다. 70년대에는 민주화투쟁 및 노동자 운동, 도시산업활동을 통해 노동자의 인권과 시민의 권리확보를 위해 노력하였다.
 
== 교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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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항기 감리교회 ==
감리교회는 일찍이 전래 당시 조선의 독립을 위해 노력한 교단이었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한국의 독립운동에 깊이 관여하여 독립협회 창설에 도움을 주었으며, 배재학당 출신 이승만을 옥중지원했으며, 3.1독립 선언을 한 33인중 이필주, 신석구 등 감리교인 9명은 장로교인 7명 함께 개신교 대표로 참여했다. 이후 일제 탄압을 받았고, 독립운동에도 직간접적으로 참여하였고, [[유관순]] 열사는 감리교인이었다. 특히 스크랜턴 선교사는 전덕기를 전도하여 서울 숭례문(남대문)에 있던 상동감리교회에서[[상동교회|상동감리교회]]에서 감리교청년 연합회인 엡웟회와 [[상동청년학원]]을 민족의식을 가진 청년들이 모여 을사조약 반대운동을 하였고, 독립 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한 "신민회"는 감리교회의 지원으로 탄생하였다. 특히 신민회가 조직된 상동감리교회는[[상동교회|상동감리교회]]는 [[이준 (1859년)|이준]]의 [[헤이그 특사]] 파견을 협의하고 실행한 곳으로 유명하다. 또한 사민필지의 저자인 헐버트 선교사는 동대문교회의 담임자로서 수많은 애국자들을 키워냈으며, 고종의 밀사로서 활약했다. 김상옥 의사는 동대문교회 출신이다.
감리교회는 [[에큐메니칼]] 운동과 [[토착화 신학]]을 강조함으로써 한국적인 상황에서 신학적 토착화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한국 개신교회 활동의 기초를 닦는 역할을 했다. 서울YMCA를 통한 하나님 나라 건설과 지덕체를 건강하게 키워내는 다양한 체육 여가활동을 연합사업으로 성장시켰고, 현재 한국 개신교회 전체가 지키는 추수감사절은 감리교와 장로교 연합공회의(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서 1921년 11월 둘째 주일 지난 수요일로 정하면서 한국 개신교의 기준이 되었고 부활절 연합예배 및 군선교 등에서 연합활동에 힘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