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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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전래시는 미국 북부의 감리회와 미국 남부의 감리회에서 온 선교사들이 별도로 [[연회]]<ref>감리교회의 감독이 자치권을 지닌 독립적 선교 구역을 의미하며, 천주교의 대교구에 대응한다. 연회는 이름과 같이 1년에 한번 연회를 가져 교회 내의 업무사항을 처리하며, 감독(또는 연회장)이 임명되어 연회 내의 지방회와 그 구성 교회를 돌보고, 목사를 안수한다.</ref>를 구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1930년]] 12월 2일 미국의 남북감리교회의 통합보다 앞서 양측의 감리교회의 통합 전권을 위임받아 조선의 두 연회가 통합하여 "기독교 조선 감리회"가 창설되었다.
 
이후 일본의 강요로 [[1943년]] '일본기독교조선감리교단'이 창설된 후 [[1945년]] [[일본기독교조선교단]]으로 강제 통합당한 감리교회는, 해방 후 다시 분리되어 새로 교단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재건파와 복흥파로 분리되는 등 홍역을 앓았다. 그러나 그 이후 다시 통합되어 [[1949년]] 현재의 이름이 채택되었다. 이후 [[1971년]] 경기연회 사건으로 총리원과 총회(갱신)측으로 분리되기도 하였으나[http://100.naver.com/100.nhn?docid=759439]{{깨진 링크|url=http://100.naver.com/100.nhn?docid=759439] }}, 이후 재통합돼 감리교단은 현재 대한민국 개신교 교파중에서 유일하게 교파 분열을 겪지 않은 교회이다. 다만 2008년 감독회장 선거로 시작된 [[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회장 선출 논쟁]]이 있었으나 2013년 현재 전용재 목사가 감독회장에 당선됨으로써 일단락됐다. 현재까지 감독 선출과 교회 운영은 감리회 본부와 총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1901년]] 김창식, 김기범이 한국 개신교 최초의 목사로 안수받았다. 또한 1930년대에 여성 선교사들의 목사 안수를 시작하였고, [[1955년]] 한국 개신교 역사상 최초로 [[전밀라]], [[명화용]] 두 여성이 목사안수를 받았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에 가입되어 있다. 70년대에는 민주화투쟁 및 노동자 운동, 도시산업활동을 통해 노동자의 인권과 시민의 권리확보를 위해 노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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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회]](年會)<ref>연회 하부 구성으로 지방회가 있다. 30-40여 교회가 모인 지역이 지방회이다.이 지방회를 이끄는 지도자가 [[감리사]]이다.</ref>: 총 13개 연회
** 10개 일반연회(서울, 서울남, 중부, 경기, 중앙, 동부, 충북, 남부, 충청, 삼남)
** 2개 선교연회 (미주<ref>미주는 선교연회로 운영되어 감독이 임명된다. [http://kmc.or.kr/board/view.php?id=head_notice&page=2&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328]{{깨진 링크|url=http://kmc.or.kr/board/view.php?id=head_notice&page=2&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328] }} 참조</ref>, 호남), 1개 특별연회 (서부)<ref>북한지역을 통칭하는 연회를 의미한다. 과거 북한 지역의 감리교회들이 그 소속으로, 감리교회의 통일 관련 업무를 담당하며, 상징적으로 감독이 임명된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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