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와 천황: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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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장|경식}} {{욱일장|0}} {{금치훈장|1}} {{서보장|1}} [[파일:Grand Crest Ordre de Leopold.png|x20px|link=레오폴 기사단|레오폴 기사단 대수장]] {{독일연방공화국 공로장|9}} [[파일:Order of the Rajamitrabhorn (Thailand) ribbon.png|x20px|link=라자미트라본 훈장]] [[파일:Order of the Southern Cross Knight (Brazil) Ribbon.png|x20px|link=남십자 기사단]] [[파일:Ord.Rajanya.Nepal-Ribbon.gif|x20px|link=오자스위 라자냐 훈장]] [[파일:PHL Order of Sikatuna - Grand Cross BAR.png|x20px|link=시카투나 훈장|시카투나 훈장 대수장]] {{핀란드 백장미 훈장|1}} [[파일:Cordone di gran Croce di Gran Cordone OMRI BAR.svg|x20px|link=이탈리아 공화국 공로장|이탈리아 공화국 공로장 대십자장경식]] [[파일:St Olavs Orden storkors stripe.svg|x20px|link=올라브 성왕 훈장|올라브 성왕 훈장 대십자장경식]] [[파일:Order of the Golden Fleece ribbon bar.svg|x20px|link=황금양모 기사단]] [[파일:Order of the Seraphim - Ribbon bar.svg|x20px|link=왕립 치천사 기사단]] [[파일:Orderelefant ribbon.png|x20px|link=코끼리 훈장]] [[파일:GRE Order Redeemer 1Class.png|x20px|link=구세주 훈장|구세주 훈장 대십자장]] [[파일:Tonga - Order of Pouono - ribbon bar.svg|x20px|link=포우오노 왕가장]] [[파일:Royal Victorian Order Honorary Ribbon.png|x20px|link=로열 빅토리아 훈장]] [[파일:Order of the Bath (ribbon).svg|x20px|link=바스 훈장]] [[파일:Order of the Garter UK ribbon.svg|x20px|link=가터 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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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와 왕'''({{llang|ja|昭和天皇|쇼와 텐노}},[[영어]]: '''Emperor Shōwa''' [[1901년]] [[4월 29일]] ~ [[1989년]] [[1월 7일]])은 [[일본]]의 제124대 [[일본 천황|천황]]이다. 본명은 '''히로히토'''({{llang|ja|裕仁}})이며, 어릴 적에 쓰이던 [[궁호]](宮號)는 '''미치노미야'''({{llang|ja|迪宮}})이다. 또, 쇼와 천황이 사용하던 [[오시루시]]는 [[대나무|어린 대나무]]를 상징했다. [[다이쇼 천황|다이쇼 왕]](요시히토)과 [[구조가|구조 공작 가문]]의 당주<ref>겸 마지막 [[후지와라 씨장자]]</ref> [[구조 미치타카]]<ref group="주해">후지와라 우지는 [[헤이안 시대]] 이후 천황 가문과 외척 관계를 형성했던 [[섭가|섭관 가문]]으로 [[겐지 (우지)|겐지]]나 [[헤이시]]처럼 자손들이 여러 가문으로 분가하였다.</ref>의 딸 [[데이메이 황후|데이메이 비]]의 맏아들이다. 1921년 [[대리청정]]을 하였다. [[메이지 천황|메이지 왕]]이 확립한 [[일세일원제]]에 따라 재위 기간 동안 쓴 [[일본의 연호|연호]]는 '''[[쇼와 시대|쇼와]]'''({{llang|ja|昭和}}) 단 하나뿐이었다.
 
재위기간 동안 [[1926년]]부터 [[1941년]]까지 친정을 하였고 [[1944년]]까지 전범 [[도조 히데키]] 총리대신이 [[권력|실권]]을 잡았으며 이듬해 [[1945년]]까지 다시 1년간 친정을 하였고 이듬해 [[1946년]]까지 [[더글러스 맥아더]]가 1년간 실권을 잡았으며 [[1952년]]까지 [[윌리엄 시볼드]] 주일 미국 대사가 6년간 실권을 잡았다가 [[1989년]]에 붕어할 때까지 또다시 친정하였다.
 
히로히토가 천황 자리에 오르던 1920년대 전후반, 일본은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극심한 불황 상태에 빠져있었고 정치적으로는 [[통제파]], [[황도파]], [[사회주의]]·[[공산주의]]·[[아나키즘]] 등의 여러 사상이 대립하였다. 1930년대 초, 수차례의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들의 비호 아래 쇼와 천황과 그 측근들은 일본 군부의 [[중국]] 침략, [[동남아시아]] 침략을 묵인했다.<ref name="빅스_33">빅스, 33쪽.</ref> 또,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거치면서 장군과 제독의 임명과 승진 과정에도 참여하는 등 일본 제국의 대외 침략 전쟁을 도왔다.<ref name="빅스_33"/>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결국 패배하자, 쇼와 천황은 일본으로 진주한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인사들과 유착 관계를 유지하면서 전범 기소와 황위 박탈은 면했지만 연합군은 [[일본국 헌법|새로운 헌법]]의 초안을 완성하면서 쇼와 천황, 그리고 앞으로의 천황들의왕들의 정치적 실권을 빼앗았다.<ref>빅스, 21쪽.</ref> 정치적 실권을 잃은 쇼와 천황은 [[해양생물학]] 연구에 매진하는 등 개인적인 삶을 살았다. 쇼와 천황은 죽은 뒤에도 일본 제국이 자행한 [[쇼와 천황의 전쟁 책임|전쟁과 전쟁 범죄에 대한 책임]]을 지려 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 즉위 전의 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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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수업을 받던 시절에 히로히토에게 영향을 준 또 다른 인물로는 [[스기우라 주고]], [[시라토리 구라키치]], [[시미즈 도루]]가 있었다. 영국 유학파 출신으로 [[국수주의]]자였던 스기우라는 히로히토를 가르치면서 일본의 국수주의와 [[제국주의]]를 옹호하고, [[표트르 1세]]와 [[빌헬름 2세]]보다 유능한 측근이 많은 일본의 왕이 더 위대하다고 주장했다.<ref name="빅스_91">빅스, 91쪽.</ref> 또한 스기우라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시혜하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충성하는” 권위주의를 정당화한 반면 사회계약론과 시민의 저항권을 주장한 [[계몽주의]]자 [[장 자크 루소]]에 대해선 “국가와 정부를 저주한다”며 깎아내렸다.<ref name="빅스_91"/> 그뿐만 아니라 스기우라는 “서양인들이 황화<ref group="주해">[[아시아]]계([[황인종]])가 인도·[[유럽]]계([[백인종]])에게 위협을 끼친다는 주장이다.</ref> 를 두려워하는 반면, 우리는 백화를 한탄한다”고 말하면서 통속적 [[사회진화론]]에 입각해 세계를 백인종과 황인종 간의 대립 중심으로 가르쳤다.<ref>빅스, 94쪽.</ref> 한편 독일 유학파 출신인 시라토리는 [[중국]]의 [[요 (군주)|요]], [[순 (군주)|순]], [[우 (하나라)|우]] 신화는 모두 허구라고 비난했으며<ref name="빅스_95">빅스, 95쪽 ~ 101쪽</ref>, 히로히토에게 역사를 가르치면서 일본을 “아시아의 평화를 확보할 유일한 나라이며, [[한국]]을 침략한 것은 [[식민지 근대화론|한국 국민들의 복지를 증진하는데 유익한 것]]”이라고 미화했다.<ref name="빅스_95"/> 마지막으로 시미즈 도루는 히로히토에게 법학 등을 가르치면서 메이지 천황을 ‘완벽한 군주상’으로 포장했다.<ref>빅스, 102쪽 ~ 105쪽.</ref>
 
=== 황태자왕자 생활 ===
[[파일:Emperor Hirohito and empress Kojun of japan.JPG|섬네일|오른쪽|히로히토가 후일 고준 황후가 되는 나가코와 함께 서 있는 사진(1924년 촬영)]]
히로히토는 1919년 5월, 만 18세의 나이로 [[성인식|성년식]]을 치렀다.<ref>빅스, 111쪽.</ref> 1917년에는 히로히토의 비가 될 이를 고르게 됐는데 어학문소에서 히로히토의 교육을 책임졌던 오가사와라 나가나리와 궁내대신 [[하타노 요시나오]]가 여기에 관여하였다. 오가사와라는 히로히토의 신부감으로 왕녀 세 명의 이름을 [[데이메이 황후|데이메이 비]](다이쇼의 비, 구조 사다코)에게 올렸고, 데이메이 황후는 이들 세 명 중 [[구니노미야 구니요시]]의 딸인 나가코(良子)를 신부로 간택했다.<ref name="빅스_122">빅스, 122쪽 ~ 124쪽.</ref>
 
이 때, 히로히토의 결혼 문제를 두고 권력 투쟁이 벌어졌다. 전 총리대신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황실에왕실에 대한 영향력을 넓히기 위해 나가코의 어머니 쪽인 [[시마즈 씨]]가 [[유전병|대대로]] [[색맹|색각 이상]]을 앓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파혼을 주장했으며 히로히토를 당분간 해외로 여행을 보내고자 “황태자비“왕자비 간택 절차를 철저히 밟지 않았다”는 구실로 하타노를 궁내대신에서 물러나게 했다.<ref name="빅스_122"/> 그러면서 야마가타는 새로운 궁내대신으로 자신의 파벌에 속한 육군중장 [[나카무라 유지로 (1852년)|나카무라 유지로]]를 추천했다. [[하라 다카시]] 총리대신은 야마가타를 지지하였는데, 하라는 다이쇼 천황의 지병이 유전적인 요인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했으며 이번 일을 계기로 야마가타와 좋은 관계를 맺어 황실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를 원했다.<ref name="빅스_122"/> 장인이 될 구니노미야는 황후 사다코와 스기우라 주고를 끌어들여 야마가타의 행보에 반격했다.<ref name="빅스_122"/>
 
스기우라는 파혼이 황실사에왕실사에 나쁜 선례를 남길 것이며, 황태자 히로히토의 앞길에도 흠으로 남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궁내성 관료들을 설득했다. 하지만 이것이 여의치 않자 스기우라는 구니노미야의 인척인 시마즈 씨 출신의 [[화족]]들을 동원했다. 그러나 야마가타와 하라가 황실의왕실의 장래를 염려하고 있다는 것과 그것의 정당성에 밀려 궁내 여론을 돌리지는 못했다.<ref name="빅스_122"/> 그러던 중 [[오쿠보 도시미치]]의 차남으로 사쓰마 파의 중심 인사 중 하나였던 [[마키노 노부아키]]가 [[파리 강화회담|파리에서 평화 회담]]을 마치고 귀국하자, 스기우라의 제자이자 [[야하타 제철소]]의 장관이었던 [[시라니 다케시]]가 마키노를 설득하려 했지만 원하는 언질을 받아내지 못했고 [[야마모토 곤노효에]]도 스기우라의 간청을 들어주지 않았다.<ref name="빅스_122"/>
 
결국 스기우라는 [[겐요샤]]의 대두였던 [[도야마 미쓰루]]에게 접근했다. 도야마는 [[흑룡회]]와 [[낭인회]] 등에 속한 동지들, [[오카와 슈메이]]나 [[기타 잇키]]와 같은 [[대아시아주의]]자들과 함께 반야마가타 투쟁에 참여했다.<ref>빅스, 125쪽.</ref> 결국 1921년 2월 초에 야마가타는 혼인에 대한 반대 의견을 철회했다. 2월 10일에는 궁내성과 내무성이 히로히토의 결혼은 예정대로 거행할 것이며, 궁내대신 나카무라 유지로와 차관 [[이시하라 겐조]]가 사임할 것이라고 발표했다.<ref name="빅스_126">빅스, 126쪽 ~ 127쪽.</ref> 또 2월 15일에 [[하라 내각]]은 히로히토가 유럽을 다녀올 것이라고 발표했다. 혼인과는 달리 히로히토의 유럽 여행은 스기우라와 도야마 등 우익 세력이 반대했던 것이었다.<ref name="빅스_126"/> 히로히토의 혼례 문제를 두고 벌어진 이 일련의 권력 투쟁은 [[요미우리 신문]] 등 전국구 언론을 중심으로 “궁중의 어떤 중대한 사건”(宮中某重大事件)으로 은폐됐다.<ref name="빅스_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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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리청정을 맡다 ===
귀국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21년 11월 25일부터 건강이 악화된 다이쇼 천황을왕을 대신해 [[대리청정]]을 하게 됐고 따라서 칭호도 셋쇼노미야({{llang|ja|摂政宮|섭정궁}})가 됐다. 전 [[내대신]] [[히라타 도스케]]와 궁내대신이 된 마키노 노부아키는 대리청정을 맡은 히로히토를 고위급 궁내관 회의에 참여시켜 회의가 끝난 뒤 회의의 요점을 묻게 하는 등 정치적인 수완을 가르치려 노력했지만 고령이었던 히라타가 몸져눕게 되자 마키노가 직접 궁정 규칙과 정치학을 히로히토에게 강론하게 됐다.<ref>빅스, 157쪽 ~ 158쪽.</ref> 그 후, [[식부성]](式部省) 장관 [[이노우에 가쓰노스케]]와 장전(掌典)<ref group="주해">일본 궁내성(지금의 [[일본 궁내청|궁내청]])의 의전직 관리직이었다.</ref>의 우두머리인 [[구조 미치자네]], 원로 [[사이온지 긴모치]]의 [[데릴사위]]이자 양자인 [[사이온지 하치로]]가 히로히토에게 궁중 제례를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경제학자 [[야마자키 가쿠지로]]와 전 [[일본은행]] 총재 [[이노우에 준노스케]]가 경제학을, 시미즈 도오루가 헌법학을, [[다치 사쿠타로]]가 국제법을 ‘정례 강의’로 히로히토에게 번갈아 가르쳤다.<ref>빅스, 160쪽 ~ 161쪽.</ref>
 
대리청정 시작 이후 히로히토는 1922년 겨울에 [[가나가와현]]과 [[시코쿠 섬]]으로 첫 행차를 떠났다.<ref name="빅스_166">빅스, 166쪽 ~ 170쪽.</ref> 행차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 1923년 4월 12일에는 요코스카를 출발해 당시 일본 제국의 식민지였던 [[타이완|타이완 섬]]으로 행차를 떠났다.<ref name="빅스_166"/> 타이완 행차의 목적은 현재 일본 황실을 대표하는 사람이 바로 히로히토임을 본국 국민들에게 알리고 타이완에 있던 다수의 비일본인들과 소수의 일본인들 모두에게 ‘타이완은 일본의 식민지임을’ 재확인시키려는 것이었다.<ref name="빅스_166"/> 히로히토는 일본이 타이완 섬에 세운 신사와 군사 시설, 일본 자본이 개입한 공장 등을 방문하고 무장 독립 운동에 참여하였다가 1915년에 붙잡혔던 535명의 형량을 ‘인애의 상징’이라는 명분으로 줄여주었다.<ref name="빅스_166"/> 히로히토는 행차 일정을 모두 마친 후 4월 27일에 섬 북쪽에 위치한 [[지룽]]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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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헌정회가 [[마쓰시마 유곽 사건]]에 연관된 정우회 인사들을 거론하며 와카쓰키 내각의 퇴진을 요구했으며, 정우회는 1926년 11월 29일에 아나키스트 [[가네코 후미코]]와 한국의 독립운동가 [[박열]] 부부의 [[가네코 후미코#괴사진 사건|괴사진]]<ref group="주해">가네코가 박열의 무릎 위에 앉은 사진으로, 정부가 반역 사건 혐의자를 우대했다는 논란의 중심이었다.</ref>을 거론하며 이를 ‘국체 문제’로 규탄하면서 와카쓰키 총리가 “국체 관념이 없다”고 비난했다.<ref name="빅스_190"/><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6082800209201043&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6-08-28&officeId=00020&pageNo=1&printNo=2146&publishType=00020 박열 사진 사건으로 결국 내각 와해?], 동아일보, 1926년 8월 28일.</ref> 국가의 주권이 어디에 있는지를 두고 벌어진 ‘국체 논쟁’은 히로히토의 대리청정 기간에 일본에서 매우 중요한 논쟁거리였다. 하지만 이러한 ‘국체’ 논쟁은 ‘천황의 일본 통치는 정당하며 천황제는 지켜져야 하는 것’이라는 결론으로 돌아갔으며 오히려 [[니치렌종]] 등의 주도로 일본의 제국주의와 천황의 전제 통치를 정당화하는 전체주의, [[국가주의|초국가주의]] 사상이 널리 퍼졌다.<ref>빅스, 194쪽 ~ 202쪽.</ref>
 
== 천황일본 왕 자리에 오르다 ==
[[파일:Emperor Showa.jpg|섬네일|왼쪽|히로히토가 즉위 후 [[소쿠타이]] 차림으로 찍은 사진(1928년)]]
부황부왕 다이쇼는 1926년 12월 25일 새벽, 가나가와 현의 하야마 별장에서 죽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6122600209201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6-12-26&officeId=00020&pageNo=1&printNo=2266&publishType=00020 천황 폐하 붕어, 25일 오전 1시 25분]<!--卄 (廿)은 20을 나타내는 한자이다.-->, 동아일보, 1926년 12월 26일.</ref> 히로히토는 부황이 죽은 직후 124번째 천황 자리에 올랐으며<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6122600209201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6-12-26&officeId=00020&pageNo=1&printNo=2266&publishType=00020 동궁전하 어천조(御踐祚), 다이쇼 천황 붕어 즉시 거행], 동아일보, 1926년 12월 26일.</ref> 메이지 시대부터 내려오는 관례대로 열린 [[추밀원 (일본)|추밀원]]은 회의에서 새로운 천황을왕을 위한 연호를 정하게 됐다.<ref name="빅스_203">빅스, 203쪽 ~ 204쪽.</ref> 앞서 다이쇼 천황이왕이 죽기 몇 주 전 [[마이니치 신문]]은 황궁에서궁에서 흘러들어온 풍문을 따라 새 황제 히로히토가 밝은 문화의 창달을 뜻하는 ‘고분’(廣文)이라는 연호를 쓰게 될 것이라고 보도했으나<ref>베르, 98쪽.</ref>, 추밀원은 천황의왕의 새로운 연호를 ‘'''쇼와'''’(昭和)라고 12월 26일에 대외에 공식 발표하였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6122600209201004&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6-12-26&officeId=00020&pageNo=1&printNo=2266&publishType=00020 쇼와로 연호 개원…], 동아일보, 1926년 12월 26일.</ref> 쇼와(소화)란 ‘밝은 조화’, ‘찬란한 평화’, ‘세상이 태평하고 백성과 임금이 하나됨’을 의미하는 한자어이다.<ref name="빅스_203"/><ref>[http://hanja.naver.com/word?query=%E6%98%AD%E5%92%8C 네이버 한자사전, "소화" (昭和)], 2012년 12월 2일 확인.</ref> 새 천황은왕은 같은 날, 육해군 장병과 와카쓰키 총리, 황실 종친 간인노미야, 사이온지 공작을 불러놓고 모든 국민에 대하여 칙어를 내어 자신의 즉위를 선포함과 동시에<ref name="빅스_203"/> 칙어를 발표하여 후임 총리 천거는 마지막 원로 사이온지에게 맡기며, 군부의 특권을 인정할 것이라고 선언했다.<ref name="빅스_203"/><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6123000209201015&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6-12-30&officeId=00020&pageNo=1&printNo=2270&publishType=00020 천황 폐하의 말씀(칙어)], 동아일보, 1926년 12월 26일.</ref> 1928년 11월 10일에는 교토로 행차하여 즉위식을 거행하였다.<ref>빅스, 224쪽.</ref><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8111000209201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8-11-10&officeId=00020&pageNo=1&printNo=2951&publishType=00020 천황 폐하, 10일 즉위식 거행]<!--한문 임의로 옮김-->, 동아일보, 1928년 11월 10일.</ref>
 
히로히토는 이제 정치 세계에 깊숙이 개입할 수 있게 됐으며, 일명 ‘측근’이라 불리는 7명의 인사들이 히로히토를 옆에서 도왔다.<ref name="빅스_204">빅스, 204쪽 ~ 213쪽.</ref> 내대신 마키노 노부아키, 시종장 [[스즈키 간타로]]<ref group="주해">1929년 1월까지는 진다 스테미가 맡았으나 곧 죽었고, 마키노는 스즈키를 시종장으로 임명했다. 1936년에 사임했다.</ref>, 무관장 나라 다케지<ref group="주해">1933년에 퇴역했다.</ref>, [[가와이 야하치]], [[세키야 데이사부로]]<ref group="주해">[[조선총독부]]에서 학무국 관리와 중추원 서기를 지냈으며 [[시즈오카현]]지사, 궁내차관을 역임했다. 히로히토의 유럽 순방 때 따라갔으며, 히로히토의 결혼 준비에도 참여했다.</ref>, 식부차장 [[오카베 나가카게]] [[자작]] 등이 바로 그들이다.<ref name="빅스_204"/> 한편, 천황의왕의 총리대신 임명권은 사이온지가 대행했는데 사이온지는 궁내관 선임에도 커다란 발언권을 행사했다.<ref name="빅스_204"/> 그러나 1927년 이후에는 궁내의 측근들이 먼저 새 총리 선정을 협의한 뒤 교토나 [[오다와라 시|오다와라]], [[오키쓰]]<ref group="주해">지금의 [[시즈오카현]] [[시즈오카 시]] [[시미즈 구]]에 있는 마을로, 2005년 이후 단행된 행정구역 통폐합 이전에는 오키쓰 정을 거쳐 [[시미즈 시]]에 속해 있었다.</ref>의 별장에서 지내던 사이온지에게 사람을 보내 재가를 얻었다.<ref name="빅스_204"/>
 
사이온지와 마키노는 근대 정당의 역할을 무시했다는 데 공통점이 있지만<ref name="빅스_204"/>, 마키노와 궁중 측근들이 곤란한 정치 문제는 천황이 관여해야 해결할 수 있다고 본 반면 사이온지는 천황이 정치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을 반대했으며, 마키노가 극우 정치인들과 함께 행동하는 것을 염려했다.<ref name="빅스_204"/> 하지만 정치적으로 새로이 두각을 드러내던 [[기도 고이치]] 후작, [[고노에 후미마로]] 공작, [[하라다 구마오]] 남작 등은 정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천황의 권위가 필요하다는 주장에 가세했다.<ref name="빅스_204"/> 사이온지는 궁중의 정책 결정 과정에 더 이상 개입하지 않았고, 궁중 측근들의 판단에 따르기로 했다.<ref name="빅스_204"/> 사이온지가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뒤로 궁중 측근들은 영국, 미국 등의 대사관부터 일선 군부대에서까지 들어오는 다양한 정보를 히로히토에게 전달하는 구실을 맡았으며, 명목 상의 입헌군주였던 히로히토의 실질적인 권력 행사를 도왔다.<ref name="빅스_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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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히토가 즉위한 직후 몇 년 동안 일본은 좌익과 우익의 대립으로 극심한 혼란에 시달렸다. 다이쇼가 죽은 뒤 휴회 상태였던 [[제52차 제국 의회]]는 1927년 1월 18일에 다시 열렸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7011900209201028&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7-01-19&officeId=00020&pageNo=1&printNo=2290&publishType=00020 18일부터 재개된 양원]<!--임의 번역-->, 동아일보, 1927년 1월 19일.</ref> 제국의회에서 쇼와 천황은 궁중 측근들과 함께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다.<ref name="빅스_214">빅스, 214쪽 ~ 218쪽.</ref> 우선 메이지 천황을 경축하여 새 천황 히로히토를 간접적으로 미화하기 위해 메이지 천황이 태어난 날인 11월 3일을 [[문화의 날 (일본)|메이지의 날]]({{llang|ja|明治節}})로 제정하여 3월 3일에 공표하였다.<ref name="빅스_214"/> 그리고 추밀원은 시데하라 외무대신의 대중국 정책을 공격하여 와카쓰키 내각을 총사직하게 했다.<ref name="빅스_214"/><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7041700200101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7-04-17&officeId=00020&pageNo=1&printNo=s1&publishType=00030 와카쓰키 내각 총사직], 동아일보, 1926년 4월 17일.</ref> 그 후, 가와이, 진다, 마키노, [[이치키 기토쿠로]] 등이 천황과 상의해,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새 총리로 세웠다. 다나카의 총리 선임 때부터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가 암살당할 때까지 총리 인선은 궁중 측근을 비롯한 내대신들이 담당하게 되었고 사이온지는 이들의 선택에 재가를 가하는 데 그치게 됐다.<ref name="빅스_214"/> 1927년 4월 20일에 [[다나카 기이치 내각]]이 출범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7042000209201005&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7-04-20&officeId=00020&pageNo=1&printNo=2381&publishType=00020 다나카 내각의 실현과 그 후], 동아일보, 1927년 4월 20일.</ref> 쇼와 천황은 마키노를 통해 다나카 기이치 내각의 각종 정책에 간섭했다.<ref name="빅스_214"/>
 
쇼와 천황은왕은 1928년 6월 4일, [[장쭤린]]이 제국 육군의 계략으로 기차를 타다 폭사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불문에 부쳐 은폐하려 했으며<ref name="빅스_237">빅스, 237쪽.</ref> 1929년 7월에 다나카의 후임으로 온건 외교 노선을 표방한 [[입헌민정당]] 총재 [[하마구치 오사치]]를 새 총리로 지명했다.<ref name="빅스_237"/> 미국·영국과의 외교적 충돌을 꺼려했던 쇼와 천황과 궁중 측근들은 해군 군비 축소 문제에 대한 가토 히로하루의 의견을 뿌리쳤으며 가토와 육군중장 [[아라키 사다오]], 도고 헤이하치로, 오가사와라 나가나리의 방해에도 아랑곳않고 하마구치가 순양함 톤수 비율에 대해 영국, 미국과 타협을 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ref name="빅스_237"/> 다나카가 있었던 정우회는 이 일을 두고 하마구치 총리와 마키노, 스즈키, 가와이 등의 측근들을 ‘군주 주변의 간신배’라고 규탄했다.<ref name="빅스_237"/> 그 후 1930년 4월 22일, 일본이 영국, 미국과 런던 해군 감축 조약을 체결하자, 정우회와 [[군령부]] 등은 반대 여론을 부추겼으며 같은 해 11월 14일에 쇼와 천황이 [[오카야마현]]에서 육군 특별 대연습을 지휘하던 사이 하마구치 총리를 극우 폭력배이자 [[애국사]] 단원인 [[사고야 도메오]]가 저격했다.<ref name="빅스_237"/><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0111500209201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30-11-15&officeId=00020&pageNo=1&printNo=3548&publishType=00020 권총 괴한, 돌연 하마구치 총리에게 총격], 동아일보, 1930년 11월 15일.</ref><ref group="주해">저격을 당한 하마구치는 1년 후인 1931년 8월 26일에 사망했다. 그 전인 같은 해 4월에 총리 자리에서 물러났다.</ref> 이 사건은 쇼와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궁중 세력과 정당 내각 사이의 우호 관계를 깨뜨리는 계기가 됐다.<ref name="빅스_237"/> 이듬해 4월 14일, 후계자 와카쓰키 레이지로가 다시 내각을 구성했지만, 군비 축소를 둔 육군과 해군의 대립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ref name="빅스_237"/>
 
== 침략 시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