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와 천황: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태그: m 모바일 웹 |
편집 요약 없음 |
||
97번째 줄:
{{국화장|경식}} {{욱일장|0}} {{금치훈장|1}} {{서보장|1}} [[파일:Grand Crest Ordre de Leopold.png|x20px|link=레오폴 기사단|레오폴 기사단 대수장]] {{독일연방공화국 공로장|9}} [[파일:Order of the Rajamitrabhorn (Thailand) ribbon.png|x20px|link=라자미트라본 훈장]] [[파일:Order of the Southern Cross Knight (Brazil) Ribbon.png|x20px|link=남십자 기사단]] [[파일:Ord.Rajanya.Nepal-Ribbon.gif|x20px|link=오자스위 라자냐 훈장]] [[파일:PHL Order of Sikatuna - Grand Cross BAR.png|x20px|link=시카투나 훈장|시카투나 훈장 대수장]] {{핀란드 백장미 훈장|1}} [[파일:Cordone di gran Croce di Gran Cordone OMRI BAR.svg|x20px|link=이탈리아 공화국 공로장|이탈리아 공화국 공로장 대십자장경식]] [[파일:St Olavs Orden storkors stripe.svg|x20px|link=올라브 성왕 훈장|올라브 성왕 훈장 대십자장경식]] [[파일:Order of the Golden Fleece ribbon bar.svg|x20px|link=황금양모 기사단]] [[파일:Order of the Seraphim - Ribbon bar.svg|x20px|link=왕립 치천사 기사단]] [[파일:Orderelefant ribbon.png|x20px|link=코끼리 훈장]] [[파일:GRE Order Redeemer 1Class.png|x20px|link=구세주 훈장|구세주 훈장 대십자장]] [[파일:Tonga - Order of Pouono - ribbon bar.svg|x20px|link=포우오노 왕가장]] [[파일:Royal Victorian Order Honorary Ribbon.png|x20px|link=로열 빅토리아 훈장]] [[파일:Order of the Bath (ribbon).svg|x20px|link=바스 훈장]] [[파일:Order of the Garter UK ribbon.svg|x20px|link=가터 훈장]]
}}
'''쇼와 왕'''({{llang|ja|昭和天皇|쇼와 텐노}},[[영어]]: '''Emperor Shōwa''' [[1901년]] [[4월 29일]] ~ [[1989년]] [[1월 7일]])은 [[일본]]의 제124대 [[일본 천황|
재위기간 동안 [[1926년]]부터 [[1941년]]까지 친정을 하였고 [[1944년]]까지 전범 [[도조 히데키]] 총리대신이 [[권력|실권]]을 잡았으며 이듬해 [[1945년]]까지 다시 1년간 친정을 하였고 이듬해 [[1946년]]까지 [[더글러스 맥아더]]가 1년간 실권을 잡았으며 [[1952년]]까지 [[윌리엄 시볼드]] 주일 미국 대사가 6년간 실권을 잡았다가 [[1989년]]에 붕어할 때까지 또다시 친정하였다.
히로히토가
== 즉위 전의 삶 ==
120번째 줄:
왕 수업을 받던 시절에 히로히토에게 영향을 준 또 다른 인물로는 [[스기우라 주고]], [[시라토리 구라키치]], [[시미즈 도루]]가 있었다. 영국 유학파 출신으로 [[국수주의]]자였던 스기우라는 히로히토를 가르치면서 일본의 국수주의와 [[제국주의]]를 옹호하고, [[표트르 1세]]와 [[빌헬름 2세]]보다 유능한 측근이 많은 일본의 왕이 더 위대하다고 주장했다.<ref name="빅스_91">빅스, 91쪽.</ref> 또한 스기우라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시혜하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충성하는” 권위주의를 정당화한 반면 사회계약론과 시민의 저항권을 주장한 [[계몽주의]]자 [[장 자크 루소]]에 대해선 “국가와 정부를 저주한다”며 깎아내렸다.<ref name="빅스_91"/> 그뿐만 아니라 스기우라는 “서양인들이 황화<ref group="주해">[[아시아]]계([[황인종]])가 인도·[[유럽]]계([[백인종]])에게 위협을 끼친다는 주장이다.</ref> 를 두려워하는 반면, 우리는 백화를 한탄한다”고 말하면서 통속적 [[사회진화론]]에 입각해 세계를 백인종과 황인종 간의 대립 중심으로 가르쳤다.<ref>빅스, 94쪽.</ref> 한편 독일 유학파 출신인 시라토리는 [[중국]]의 [[요 (군주)|요]], [[순 (군주)|순]], [[우 (하나라)|우]] 신화는 모두 허구라고 비난했으며<ref name="빅스_95">빅스, 95쪽 ~ 101쪽</ref>, 히로히토에게 역사를 가르치면서 일본을 “아시아의 평화를 확보할 유일한 나라이며, [[한국]]을 침략한 것은 [[식민지 근대화론|한국 국민들의 복지를 증진하는데 유익한 것]]”이라고 미화했다.<ref name="빅스_95"/> 마지막으로 시미즈 도루는 히로히토에게 법학 등을 가르치면서 메이지 천황을 ‘완벽한 군주상’으로 포장했다.<ref>빅스, 102쪽 ~ 105쪽.</ref>
===
[[파일:Emperor Hirohito and empress Kojun of japan.JPG|섬네일|오른쪽|히로히토가 후일 고준 황후가 되는 나가코와 함께 서 있는 사진(1924년 촬영)]]
히로히토는 1919년 5월, 만 18세의 나이로 [[성인식|성년식]]을 치렀다.<ref>빅스, 111쪽.</ref> 1917년에는 히로히토의 비가 될 이를 고르게 됐는데 어학문소에서 히로히토의 교육을 책임졌던 오가사와라 나가나리와 궁내대신 [[하타노 요시나오]]가 여기에 관여하였다. 오가사와라는 히로히토의 신부감으로 왕녀 세 명의 이름을 [[데이메이 황후|데이메이 비]](다이쇼의 비, 구조 사다코)에게 올렸고, 데이메이 황후는 이들 세 명 중 [[구니노미야 구니요시]]의 딸인 나가코(良子)를 신부로 간택했다.<ref name="빅스_122">빅스, 122쪽 ~ 124쪽.</ref>
이 때, 히로히토의 결혼 문제를 두고 권력 투쟁이 벌어졌다. 전 총리대신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스기우라는 파혼이
결국 스기우라는 [[겐요샤]]의 대두였던 [[도야마 미쓰루]]에게 접근했다. 도야마는 [[흑룡회]]와 [[낭인회]] 등에 속한 동지들, [[오카와 슈메이]]나 [[기타 잇키]]와 같은 [[대아시아주의]]자들과 함께 반야마가타 투쟁에 참여했다.<ref>빅스, 125쪽.</ref> 결국 1921년 2월 초에 야마가타는 혼인에 대한 반대 의견을 철회했다. 2월 10일에는 궁내성과 내무성이 히로히토의 결혼은 예정대로 거행할 것이며, 궁내대신 나카무라 유지로와 차관 [[이시하라 겐조]]가 사임할 것이라고 발표했다.<ref name="빅스_126">빅스, 126쪽 ~ 127쪽.</ref> 또 2월 15일에 [[하라 내각]]은 히로히토가 유럽을 다녀올 것이라고 발표했다. 혼인과는 달리 히로히토의 유럽 여행은 스기우라와 도야마 등 우익 세력이 반대했던 것이었다.<ref name="빅스_126"/> 히로히토의 혼례 문제를 두고 벌어진 이 일련의 권력 투쟁은 [[요미우리 신문]] 등 전국구 언론을 중심으로 “궁중의 어떤 중대한 사건”(宮中某重大事件)으로 은폐됐다.<ref name="빅스_126"/>
137번째 줄:
=== 대리청정을 맡다 ===
귀국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21년 11월 25일부터 건강이 악화된 다이쇼
대리청정 시작 이후 히로히토는 1922년 겨울에 [[가나가와현]]과 [[시코쿠 섬]]으로 첫 행차를 떠났다.<ref name="빅스_166">빅스, 166쪽 ~ 170쪽.</ref> 행차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 1923년 4월 12일에는 요코스카를 출발해 당시 일본 제국의 식민지였던 [[타이완|타이완 섬]]으로 행차를 떠났다.<ref name="빅스_166"/> 타이완 행차의 목적은 현재 일본 황실을 대표하는 사람이 바로 히로히토임을 본국 국민들에게 알리고 타이완에 있던 다수의 비일본인들과 소수의 일본인들 모두에게 ‘타이완은 일본의 식민지임을’ 재확인시키려는 것이었다.<ref name="빅스_166"/> 히로히토는 일본이 타이완 섬에 세운 신사와 군사 시설, 일본 자본이 개입한 공장 등을 방문하고 무장 독립 운동에 참여하였다가 1915년에 붙잡혔던 535명의 형량을 ‘인애의 상징’이라는 명분으로 줄여주었다.<ref name="빅스_166"/> 히로히토는 행차 일정을 모두 마친 후 4월 27일에 섬 북쪽에 위치한 [[지룽]]을 떠났다.
149번째 줄:
우선 헌정회가 [[마쓰시마 유곽 사건]]에 연관된 정우회 인사들을 거론하며 와카쓰키 내각의 퇴진을 요구했으며, 정우회는 1926년 11월 29일에 아나키스트 [[가네코 후미코]]와 한국의 독립운동가 [[박열]] 부부의 [[가네코 후미코#괴사진 사건|괴사진]]<ref group="주해">가네코가 박열의 무릎 위에 앉은 사진으로, 정부가 반역 사건 혐의자를 우대했다는 논란의 중심이었다.</ref>을 거론하며 이를 ‘국체 문제’로 규탄하면서 와카쓰키 총리가 “국체 관념이 없다”고 비난했다.<ref name="빅스_190"/><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6082800209201043&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6-08-28&officeId=00020&pageNo=1&printNo=2146&publishType=00020 박열 사진 사건으로 결국 내각 와해?], 동아일보, 1926년 8월 28일.</ref> 국가의 주권이 어디에 있는지를 두고 벌어진 ‘국체 논쟁’은 히로히토의 대리청정 기간에 일본에서 매우 중요한 논쟁거리였다. 하지만 이러한 ‘국체’ 논쟁은 ‘천황의 일본 통치는 정당하며 천황제는 지켜져야 하는 것’이라는 결론으로 돌아갔으며 오히려 [[니치렌종]] 등의 주도로 일본의 제국주의와 천황의 전제 통치를 정당화하는 전체주의, [[국가주의|초국가주의]] 사상이 널리 퍼졌다.<ref>빅스, 194쪽 ~ 202쪽.</ref>
==
[[파일:Emperor Showa.jpg|섬네일|왼쪽|히로히토가 즉위 후 [[소쿠타이]] 차림으로 찍은 사진(1928년)]]
히로히토는 이제 정치 세계에 깊숙이 개입할 수 있게 됐으며, 일명 ‘측근’이라 불리는 7명의 인사들이 히로히토를 옆에서 도왔다.<ref name="빅스_204">빅스, 204쪽 ~ 213쪽.</ref> 내대신 마키노 노부아키, 시종장 [[스즈키 간타로]]<ref group="주해">1929년 1월까지는 진다 스테미가 맡았으나 곧 죽었고, 마키노는 스즈키를 시종장으로 임명했다. 1936년에 사임했다.</ref>, 무관장 나라 다케지<ref group="주해">1933년에 퇴역했다.</ref>, [[가와이 야하치]], [[세키야 데이사부로]]<ref group="주해">[[조선총독부]]에서 학무국 관리와 중추원 서기를 지냈으며 [[시즈오카현]]지사, 궁내차관을 역임했다. 히로히토의 유럽 순방 때 따라갔으며, 히로히토의 결혼 준비에도 참여했다.</ref>, 식부차장 [[오카베 나가카게]] [[자작]] 등이 바로 그들이다.<ref name="빅스_204"/> 한편,
사이온지와 마키노는 근대 정당의 역할을 무시했다는 데 공통점이 있지만<ref name="빅스_204"/>, 마키노와 궁중 측근들이 곤란한 정치 문제는 천황이 관여해야 해결할 수 있다고 본 반면 사이온지는 천황이 정치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을 반대했으며, 마키노가 극우 정치인들과 함께 행동하는 것을 염려했다.<ref name="빅스_204"/> 하지만 정치적으로 새로이 두각을 드러내던 [[기도 고이치]] 후작, [[고노에 후미마로]] 공작, [[하라다 구마오]] 남작 등은 정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천황의 권위가 필요하다는 주장에 가세했다.<ref name="빅스_204"/> 사이온지는 궁중의 정책 결정 과정에 더 이상 개입하지 않았고, 궁중 측근들의 판단에 따르기로 했다.<ref name="빅스_204"/> 사이온지가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뒤로 궁중 측근들은 영국, 미국 등의 대사관부터 일선 군부대에서까지 들어오는 다양한 정보를 히로히토에게 전달하는 구실을 맡았으며, 명목 상의 입헌군주였던 히로히토의 실질적인 권력 행사를 도왔다.<ref name="빅스_204"/>
161번째 줄:
히로히토가 즉위한 직후 몇 년 동안 일본은 좌익과 우익의 대립으로 극심한 혼란에 시달렸다. 다이쇼가 죽은 뒤 휴회 상태였던 [[제52차 제국 의회]]는 1927년 1월 18일에 다시 열렸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7011900209201028&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7-01-19&officeId=00020&pageNo=1&printNo=2290&publishType=00020 18일부터 재개된 양원]<!--임의 번역-->, 동아일보, 1927년 1월 19일.</ref> 제국의회에서 쇼와 천황은 궁중 측근들과 함께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다.<ref name="빅스_214">빅스, 214쪽 ~ 218쪽.</ref> 우선 메이지 천황을 경축하여 새 천황 히로히토를 간접적으로 미화하기 위해 메이지 천황이 태어난 날인 11월 3일을 [[문화의 날 (일본)|메이지의 날]]({{llang|ja|明治節}})로 제정하여 3월 3일에 공표하였다.<ref name="빅스_214"/> 그리고 추밀원은 시데하라 외무대신의 대중국 정책을 공격하여 와카쓰키 내각을 총사직하게 했다.<ref name="빅스_214"/><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7041700200101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7-04-17&officeId=00020&pageNo=1&printNo=s1&publishType=00030 와카쓰키 내각 총사직], 동아일보, 1926년 4월 17일.</ref> 그 후, 가와이, 진다, 마키노, [[이치키 기토쿠로]] 등이 천황과 상의해,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새 총리로 세웠다. 다나카의 총리 선임 때부터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가 암살당할 때까지 총리 인선은 궁중 측근을 비롯한 내대신들이 담당하게 되었고 사이온지는 이들의 선택에 재가를 가하는 데 그치게 됐다.<ref name="빅스_214"/> 1927년 4월 20일에 [[다나카 기이치 내각]]이 출범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7042000209201005&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7-04-20&officeId=00020&pageNo=1&printNo=2381&publishType=00020 다나카 내각의 실현과 그 후], 동아일보, 1927년 4월 20일.</ref> 쇼와 천황은 마키노를 통해 다나카 기이치 내각의 각종 정책에 간섭했다.<ref name="빅스_214"/>
쇼와
== 침략 시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