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와라노 미치자네: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잔글편집 요약 없음
48번째 줄:
[[나라 시]]의 깃코지(喜光寺)라는 절에 전해지는 전승에 따르면 미치자네는 지금의 나라 시 스가와라마치(菅原町) 주변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이밖에도 교토 시모쿄구의 간다이진 신사(菅大臣神社)와 [[가미교 구]]의 스가와라노인덴만구(菅原院天満宮), [[미나미 구]]의 깃쇼인덴만구(吉祥院天満宮), [[나라현]] [[요시노 군]] 요시노마치(吉野町)의 스고사(菅生寺), [[시마네현]] [[마쓰에 시]]의 스가와라덴만구(菅原天満宮) 등이 미치자네의 탄생지로 여겨지고 있어 확실하지 않다. [[시가현]]( [[나가하마 시]]에 있는 요고 호수(余呉湖)의 날개옷 설화에서는 "천녀와 그 지역의 동연대부(桐畑太夫) 사이에 태어난 아이가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였으며 어려서 근처의 스가야마지(菅山寺)에서 공부했다"라고 전하고 있다.
 
어려서부터 시가에 재주를 보였던 미치자네는 [[조간 (연호)|조간]](貞観) 4년([[862년]]), 18세로 문장생(文章生)이 되었다. 조간 9년([[867년]])에는 문장생 가운데 단 두 명만이 뽑혔던 문장득업생(文章得業生)으로 뽑혔고 정6위하에 봉해져 시모스케노곤노소죠(下野権少掾)가 된다. 조간 12년([[870년]])에는 방략시(方略試)에서 상등으로 합격했는데, 규정에 따르면 3계를 높여야 했지만 그렇게 될 경우 5위에 이른다고 해서 1계만을 더해 정6위상에 봉해졌다. 이듬해에는 현번조(玄蕃助)가 되고 나아가 소내기(少内記)로 옮겼다. 조간 16년([[874년]])에는 종5위하 병부소보(兵部少輔)에 이어 민부소보(民部少輔)에 임명되었다. [[간교]] 원년([[877년]])에는 식부소보(式部少輔)에 임명되었으며, 이 해에 집안 대대로 맡아온 관직인 문장박사를 겸임하게 된다. 간교 3년([[879년]]), 종5위에 서임되었으며, [[닌나]] 2년([[886년]])에 사누키노카미(讃岐守)로 임명되어 식부소보 겸 문장박사의 직책은 사임하고 부임지 사누키로 낙향했는데, 닌나 4년([[888년]])에 일어난 [[아코 사건 (887년)|아코 사건]](阿衡事件)에 즈음해 후지와라노 모토쓰네에게 의견서를 보내 충고함으로써 사건을 수습했다. 간표 2년([[890년]])에 임지 사누키 국에서 교토로 돌아왔다.
 
그 무렵부터, 여지껏 집안의 신분에 따른 관직 안에 머물러 있었던 미치자네는 우다 천황의 신임을 받으며 이후 요직을 역임하게 되는데(당시 황실의 외척으로서 권세를 휘두르던 [[후지와라 씨]]에 유력한 인물이 없었던 점 등을 계기로 우다 천황은 미치자네를 이용해 후지와라 씨를 견제하려 했다) 간표 3년([[891년]])에 구란도노카미(蔵人頭)에 보임되고 나아가 식부소보(式部少輔)와 좌중변을 겸무하게 된 것을 시작으로 이듬해에는 종4위하에 봉해지고 좌경대부(左京大夫)를 겸임하였으며, 그 이듬해에는 또 다시 산기 식부대보로 보임되고 좌대변(左大弁) ・ 감해유장관(勘解由長官) ・ 춘궁량(春宮亮)을 겸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