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모토노 요시쓰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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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에 요리토모가 직접 군을 이끌고 요시쓰네 추토에 나서자, 요시쓰네는 서쪽에서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규슈행을 꾀했다. 11월 1일에 요리토모가 스루가 국의 기세 강에 이르렀고, 11월 3일 요시쓰네 등은 규슈의 오가타(緒方) 집안을 의지해, 3백 기를 이끌고 교토를 떠났다. 도중에 셋쓰 겐지의 [[다다 유키쓰나]](多田行綱) 등의 습격을 받아 이를 격퇴하기도 했다. 6일에 일행은 셋쓰 국 오오모노우라(효고 현 [[아마가사키 시]])에서 선단을 짜서 규슈로 가려 했지만, 도중에 폭풍으로 난파하는 바람에 주종은 흩어지고 셋쓰로 밀려와 버렸다. 이로써 요시쓰네가 규슈로 가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11월 7일에는 요시쓰네가 가지고 있던 관직을 모두 박탈당했다. 11월 25일에는 요시쓰네와 유키이에를 잡아들이라는 인센이 여러 쿠니마다 내려졌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요리토모는 12월, 앞서 요리토모 추토의 선지를 작성했던 자나 친요시쓰네파 구교들을 해임하게 하고, 요시쓰네 등의 추포를 위해 여러 구니에 슈고(守護)와 지토(持頭)의 설치를 요구했고, 요시쓰네 대신 요리토모의 대관으로서 교토에 들어온 [[호조 도키마사]]를 통한 조정 사이의 교섭 끝에, 설치를 인정받는데 성공한다.
 
요시쓰네는 그의 가신들이나 애첩인 시라뵤시(白拍子) [[시즈카 고젠]](靜御前)과 함께 [[요시노]]에 몸을 숨겼지만, 여기에서도 추토를 받고 시즈카 고젠은 붙잡혔다. 도망친 의경은요시쓰네는 반카마쿠라파 귀족이나 지샤의 도움으로 교토 주변에 숨기도 했지만, 이듬해([[1186년]]) 5월에 이즈미 국에서 숙부 유키이에가 가마쿠라측에 피살되고 각지에 잠복해 있던 가신들도 차례대로 발각되어 살해된다. 그러한 가운데, 요시쓰네의 이름이 요시쓰네에서 요시유키(義行)로 개명되었다가(《교쿠요》 5월 10일조) 다시 요시카타(義顯)로 개명당하고 있는데(동서 11월 24일조) 모두가 요리토모의 의향에 의한 것으로 조정 측에서의 소식일 뿐, 요시쓰네 본인이 이를 인지하고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인이나 귀족들이 요시쓰네를 일부러 놓아주는 것이 아닌가 의심한 요리토모는 동년 11월에 "교토측에서 요시쓰네 편을 들겠다면 대군을 보낼 것"이라며 협박하기도 했다.
 
교토에서 더 발붙일 곳이 없게 된 요시쓰네는 가신들과 함께 다시 한 번 오슈에 몸을 의탁한다. 《아즈마카가미》 분지 3년([[1187년]]) 2월 10일의 기록에 보면 요시쓰네는 추포망을 뚫고 이세ㆍ미노를 지나 오슈로 향했는데, 일행은 도다이사 재건을 위한 권진 일행으로 변장하고서 정실 사토 고젠과 딸을 데리고 히라이즈미에 숨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