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요호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Choboty (토론 | 기여)
잔글 영어판 분류 정보를 이용.+분류:황해; 예쁘게 바꿈
날짜 오류 수정
4번째 줄:
|그림크기=350px
|설명 = 운요호 사건
|날짜=[[1875년]] [[9월 20일21일]]([[음력 8월 21일22일]])
|장소= [[강화도]]
|결과= [[조선]]의 패배, [[강화도 조약]] 조인
17번째 줄:
}}
 
'''운요호 사건'''(雲揚號事件, [[1875년]] [[9월 20일21일]]([[대한제국 고종|고종]] 12년, [[음력 8월 21일22일]])<ref>고종실록 12권, 고종 12년 8월 22일 병술 1번째기사, 二十二日。 永宗僉使李敏德以"異樣船蘭芝島留碇"啓。영종 첨사(永宗僉使) 이민덕(李敏德)이, ‘이양선(異樣船)이 난지도(蘭芝島)에 정박하고 있습니다.’라고 아뢰었다.</ref> 또는 '''강화도 사건'''(江華島事件)은 [[통상조약]] 체결을 위해 일본 [[군함]] 운요호가 [[불법]]으로 강화도에 들어와 [[측량]]을 구실로 [[조선]] [[정부]]의 동태를 살피다 조선 [[수비대]]와 [[전투]]를 벌인 [[사건]]이다.
 
== 배경 ==
23번째 줄:
 
== 발생 ==
[[9월 20일21일]]([[음력 8월 21일22일]]) 이번에는 서해 강화도 동남쪽 [[난지도]](蘭芝島) 부근에 정박하고 식수를 구한다는 구실로 보트에 군인을 분승시켜 연안을 정탐하면서 강화도의 [[초지진]](草芝鎭) 포대까지 접근하였다. 조선군의 접근하지 말라는 명령에도 불구하고 불법 접근한 일본군에게 조선의 초지진 포대에서 포격을 가하자 운요호에서도 맹포격으로 응수하였다. 포의 성능이나 포술이 우세인 일본군은 초지진을 파괴하고, [[영종진]](永宗鎭)에도 맹포격을 가하면서 [[일본 해군 육전대|육전대]](陸戰隊)까지 상륙시켜 살인ᆞ방화ᆞ약탈을 자행하였다. 일본은 한편으로 부산에 전함을 파견하고 병사를 상륙시켜 [[함포외교]]를 계획했다.
<ref>운요호 사건 발생 18일 후인 1875년 10월 8일에 운요호 함장이 작성한 <조선강화도포격시말>에 기록된 내용을 바탕으로 강화도 인근 해안 측량 중 식수를 구하기 위하여 접근하였다가 조선이 포격을 해왔다고 주장하였으나, 이보다 10일 먼저 운요호 함장이 작성한 <조선회항기사>에는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접근했고 운요호가 선제 발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ref>
조선군은 전사자 35명, 포로 16명을 내고, 대포 35문, [[화승총]] 130여 정과 무수한 군기 등을 약탈당하였으며, 일본군은 단지 2명의 경상자만 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일본은 포격전의 책임을 조선에 돌렸으며, 아울러 무력을 배경으로 개항을 강요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