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케후 마사유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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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단 이후 1974년 춘계 스프링 캠프에서 철저한 단련을 받았다. 시범 경기에서의 첫 출전은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난카이 호크스]]전이었는데 같은 해 [[노자키 쓰네오]](1971년 드래프트 1순위로 난카이에 입단)로부터 대타로서 첫 안타를 기록했다. 시범 경기에 첫 선발로 출전한 것은 3월 21일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다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스]]전([[도쿠시마현 나루토 종합 운동 공원 야구장|나루토 구장]])에서 중심축인 [[유격수]] [[후지타 다이라]]가 결혼식 때문에 경기에서 빠져 7번·유격수 자리에 그 대역으로 들어간 것이었으나 [[히가시오 오사무]]를 상대로 4타수 2안타를 기록했다. 그리고 3일 후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긴테쓰 버펄로스]]전([[닛폰 생명 구장]])에서는 내야의 중심인 [[노다 유키토시]](이후에는 매니저)가 모친상을 당하여 귀향하는 바람에 또다시 가케후가 8번·[[3루수]]로 대신 출전하게 됐는데 이 경기에서 4타수 4안타를 기록하는 맹활약을 펼쳤다. 시범 경기가 끝난 뒤 최종 성적은 18타수 8안타, 2개의 2루타를 때려내는 등의 활약으로 개막 1군에 합류, 고졸 1년 째에 개막전 1군에 정착했으며 같은 해에는 주니어 올스타전에도 출전했다. 고졸 신인으로서 1군에서의 홈런은 3개이며, 구단 기록의 8개(1957년, [[나미키 데루오]])에는 미치지 못했다.
 
고교 시절에는 유격수였지만 당시 한신에는 후지타 다이라가 부동의 주전이었기 때문에 3루수를 맡았다. 가케후와 같은 해 드래프트 1순위로 입단한 [[사노 노리요시]]도 3루수였기 때문에 포지션 경쟁이 벌어졌다.<ref>[http://column.sp.baseball.findfriends.jp/?pid=column_detail&id=097-20180822-10 {{lang|ja|掛布雅之【前編】エースの勝負球を打つ四番/プロ野球1980年代の名選手}}] - 슈칸 베이스볼 온라인, 2018년 8월 22일</ref> 1975년에 감독으로 취임한 [[요시다 요시오]]는 당초 상대가 우완 투수일 때는 좌타자 가케후, 좌완 투수일 때는 우타자 사노를 기용하는 식으로 나갔으나 가케후가 곧바로 3루수 자리를 굳혔고<ref>요시다에 의하면 당시 [[이치에다 슈헤이]] 코치가 가케후를 강력 추천했다고 한다(《우시와카마루의 이력서》 닛케이 비즈니스 인문고, 2009년, p.161).</ref> 사노는 외야수로 옮겨갔다. 가케후가 포지션을 둘러싸고 “라이벌로 느낀 것은 이 때의 사노 밖에 없었다”고 한다. 1980년에 [[와세다 대학]] 출신의 거물급 3루수였던 [[오카다 아키노부]]가 입단했을 때에도 언론이 “포지션 쟁탈전이 벌어지나?”라고 떠들썩했을 때도 가케후는 이미 팀의 중심 선수로서 여유가 넘쳤고 사노만큼 라이벌 의식은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ref>분슌 비주얼 문고 - ‘호타열전 2’, [[분게이슌주]]</ref>
 
1976년, [[오 사다하루]]를 웃도는 타율 5위에 랭크되며 같은 해 [[일본 프로 야구 베스트 나인|베스트 나인]]에 선정됐는데 가케후는 “타격 10위권에서 사다하루보다 위에 섰다는 게 큰 자신감을 느꼈다”라고 말했다.<ref>분슌 Number 비디오 - ‘열투! 한신 vs 요미우리 1200 경기’, [[분게이슌주]]</ref> 더 나아가 이듬해인 1977년에도 대활약을 펼쳤고, 응원가 ‘GO! GO! 가케후’도 대대적으로 팔리기도 했다. 이러한 인기에 힘입어 응원단은 가케후가 타석에 들어서면 응원가를 연주하게 됐다. 최초의 응원가는 ‘GO! GO! 가케후’의 후렴구였는데 후에 변경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