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 김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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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조에 대해 ===
조선 후기 [[1784년]] 개성 어느 산기슭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는 「김은열(金殷說) 묘지석」을 바탕으로 김노규(金魯奎)가 기사(記事)한 《김은열 묘지명》에 [[경순왕]] 8자(子)들이 등장하는데, 5자가 '''중석'''(重錫)이라 한다.
조선 후기 [[1784년]] 개성 어느 산기슭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는 《김은열 묘지명》에 [[경순왕]]의 5자가 '''김중석'''(金重錫)이라 한다. 이후 [[경주 김씨]] 일문 족보류에 이름이 등재되기 시작하였는데, 족보에 옮기는 과정에 '중석'(重錫)을 '''석'''(錫)으로 개명(改名)하고, [[경순왕]] 아들들 시호를 작호(作號)하는 등 가필(加筆)을 심하게 하였다. 또한 '중석'(重錫) 또는 '석'(錫)를 비롯한 《김은열 묘지명》에 등장하는 [[경순왕]]의 8자들의 이름은 《고려사》 등의 정사는 물론이고, 그 어떤 금석문(金石文)에도 찾아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후 [[1785년]] [[김사목]] [[경주 김씨]] 족보를 수보(修普) 하면서 《고려평장사 보국대안군 김은열 묘지명》을 추기(追記) 하였는데, 2자 굉(鍠)을 황(湟)으로, 3자 명(鳴)을 명종(鳴鍾)으로 개명하고, 4자 은열(殷說)의 시호를 보국대안군(輔國大安君)으로 작호(作號) 하는 등 가필(加筆)을 심하게 하였다. 이후부터 [[경주 김씨]] 일문 족보류에 [[경순왕]] 8자(子)들이 등재되기 시작하였다.<ref>경순왕 8자(子)는 일(鎰), 굉(鍠)[또는 황(湟)], 명(鳴)[또는 명종(鳴鍾)], 은열(殷說), 중석(重錫), 건(鍵), 선(鐥), 종(鐘)이며, 2자 굉(鍠)[또는 황(湟)]과 제4자 은열(殷說)는 고려 태조의 외손인 낙랑공주 소생으로 평장사를 지내고 공(功)이 있는 신하여서 특별히 장지(葬地)를 하사해 주었다고 한다.</ref>
이후 시조 '''김석'''(金錫)의 출생에 대해 [[경순왕]]의 4자설과 5자설이 대두되었다. 《의성김씨족보》·《경주김씨 계림군파족보》·《언양김씨 족보》등에는 [[경순왕]] 4자로 기록되어 있으나, 최근 문헌인 《신라김씨 2천년사》·《조선씨족통보》·《동국만성보》·《신라김씨분파연원도》등에는 5자로 기록하고 있다. 후손들은 선조의 뜻에 따라 4자설을 따르고 있는바, 이를 부정할 객관적이고 명확한 증거가 없는 관계로 이는 당연하다 하겠다.
 
그러나 《김은열 묘지명》에 나오는 [[경순왕]] 8자들의 이름은 《고려사》 등의 문헌(文獻)은 물론이고, 그 어떤 금석문(金石文) 자료에도 찾아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또 묘지명 형태도 배위(配位) 관계 및 생애 등도 누락되어 있고 단지 형제 서차만 기술되어 있을 뿐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1814년]] 김계락(金啓洛)이 찬하고, [[경주 김씨]] 일문들이 세운 「신라경순왕전비」에 [[경순왕]]은 전비 박씨와의 사이에 3남 1녀를 두었는데 태자(太子), 차자(次子), 영분공(永芬公)이며, 딸은 고려 경종에게 출가하였다고 한다. 후비 왕씨와는 5남 2녀를 두었는데 은열(殷說), 석(錫), 건(鍵), 선(鐥), 추(錘)이며, 장녀(長女)는 이금서(李金書), 차녀(次女)는 황경(黃瓊)에게 출가하였다고 한다. 여기서는 《김은열 묘지명》에 나오는 1자 일(鎰), 2자 황(湟), 3자 명종(鳴鍾)을 배척하고, 5자 ‘중석’(重錫)을 ‘석’(錫)으로, 8자 ‘종’(鐘)을 ‘추’(錘)로 개명하였다.
 
[[1887년]] 숭혜전(崇惠殿) 건립 때 대제학 김창희(金昌熙)가 [[경주 김씨]] 분파(分派) 시말을 편찬한 《김씨 분관록》에 [[경주 김씨]]는 [[경순왕]]의 후예라 하고, [[경순왕]] 왕자들인 학성부원군(鶴城府院君) 덕지(德摯), 의성군(義城君) 석(錫), 언양군(彦陽君) 선(鐥) 삼척군(三陟君) 추(錘)는 분적하여 울산, 의성, 언양, 삼척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김창희(金昌熙)는 그의 증조부 [[김사목]]이 추기한 《김은열 묘지명》의 경순왕 8자(子)들을 모두 배척하고 있다.
 
== 분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