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TedBot (토론 | 기여)
잔글 봇: 틀 이름 및 스타일 정리
56번째 줄:
* [[투르쿠]]({{lang|fi|Turku}}), [[콧카]]({{lang|fi|Kotka}}), [[항코]]({{lang|fi|Hanko}}), [[헬싱키]], [[비푸리]]({{lang|fi|Vipuri}}) 등 [[발트 해]]에 속한 [[보트니아 만]]과 [[핀란드 만]]을 접하고 있는 주요 항구에 대한 소련군 주둔권과 조차 권리. 대부분 약 30년에서 40년 가량이었으며 준수할 것인가도 미지수였다.
 
당시 핀란드 대통령인 [[퀴외스티 칼리오]]가 이를 거부하자, 핀란드 침공에 적절한 구실이 필요했던 소련군은 [[1939년]] [[11월 26일]] 국경지대인 만네르헤임 선 부근에서 핀란드군이 소련군을 공격했다며 이를 이유로 침공을 시작했는데, 이를 이른바 [[마이닐라 발포 사건]](Mainilan laukaukset) 이라고 한다. 이를 근거로 소련은 [[11월 29일]] 핀란드와 외교 관계를 끊었으며 [[11월 30일]] 46만 명으로 이루어진 23개 사단으로 핀란드를 공격해 순식간에 [[만네르헤임 선]]까지 도달했는데, 이는 [[1939년]] 10월부터 이와 같은 침공을 위해 소련은 이미 국경지대에 병력을 주둔시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이닐라 발포사건이발포 사건]]이 꾸며낸 주장이라는 것은 핀란드 측에서는 오랫동안 추측해온 사실이지만 최근에야 소련의 비밀문서들이 공개되면서 꾸며낸 주장이라는 것으로 분명히 판명되었다. 이 사건은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이었던 [[안드레이 즈다노프]]({{llang|ru|Andrei Zhdanov}})가 비밀리에 [[그리고리 쿠릭]]({{llang|ru|Grigory Kulik}}) 장군에게 명령을 내려 소련군에게 고의적으로 포격을 한 후 핀란드군의 공격이라고 꾸민 일이었는데, 당시 핀란드군 포병의 장사정 포는 마이닐라까지 사정거리가 못 미치는 즉 핀란드-소련 국경에서 약 20km에서 25 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해 있었고, 이러한 '핀란드군의 포격'에 의한 소련군의 '전사자'는 전혀 없었다. 마이닐라 발포사건 이후 스탈린과 그의 군부 지도자들은 전쟁을 결심하게 된다.
그러나 소련은 핀란드로부터 뜻밖의 반격을 당하게 되었다. 핀란드인들은 대항했고, 협상 테이블에서처럼 끈기 있게 싸웠다. 그들은 모든 인력과 빈약한 물자 그리고 전통적으로 기지(機智)가 풍부한 국민성 등 모든 것을 동원하여 빙점 이하의 혹한 속에서, 자기들에게 유리한 조건을 찾아내가면서 거대한 소련군과 대결했다. 이 핀란드와 소련과의 싸움은 당시의 가혹한 기후 때문에 겨울 전쟁이라 불리게 되었다.
 
[[마이닐라 발포 사건]] 당시 소련군이 점령한 국경 지대의 마을인 테르요키(Terijoki)<ref>현 [[젤레노고르스크 (상트페테르부르크)|젤레노고르스크]](Zelenogorsk)</ref> 에서는 [[1939년]] [[12월 1일]] 핀란드 민주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오토 빌레 쿠시넨]](Otto Ville Kuusinen)을 수장으로 한 이른바 '테르요키 정부'라는 [[괴뢰 정부]]가 수립되었다. 소련이 괴뢰 정부를 수립한 것에는 정치 목적<ref>소련은 즉시 이 정부를 핀란드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했다.</ref> 과 군사 목적<ref>핀란드군의 공산주의자들을 회유하려 했다.</ref> 이 있었다. 하지만 그리 큰 성공은 거두지 못하였다. 이 공화국은 [[1940년]] [[3월 12일]]까지 존속되다가 모스크바 평화 조약으로 겨울 전쟁이 끝나자 새로 수립된 [[카렐리야-핀란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합병되었다. 이 정부는 [[1956년]] 해체되었으며 그 후 [[카렐리야 공화국]]에 합병되었다.
 
== 전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