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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TO에 반강제적으로 가입한데 이어 팔레비 국왕은 1959년 미국과 방위조약을 체결, 미군 주둔을 허용한다. 1963년 팔레비는 6개항의 개혁조치를 국민투표에 부쳐 이른바 '백색혁명'을 시작했다. 주 내용은 토지 개혁, 근로자에 회사 이윤 분배, 삼림과 목초지 국유화, 국영 사업장 매각, 노동자, 농민에 유리하게 선거법 개정, 문맹 퇴치 지원 등이었으며 여성에게도 투표권을 부여했다. 특히 역점을 두어 추진하였던 토지 개혁은 아버지 레자 샤 시절 무산됐던 것으로, 팔레비 국왕이 솔선해서 왕실 토지를 농민들에게 분배하기도 했다.
 
하지만 토지 소유자와 겹치는 이슬람 성직자 층은진영은 이 조치에 크게 반발한다. 이들은 아야툴라 [[루홀라 호메이니]]의 지도 아래 반(反)백색혁명 운동을 벌였다. 호메이니는 가택연금 됐다가 이듬해 터키(뒤에는 이라크)로 망명했다. 성직자들의 반대 속에서도 토지 개혁은 진행됐고, 경제도 나아졌다.
 
국정에 자신감이 생긴 팔레비는 1967년 10월 오랫동안 미루어 왔던 대관식을 거행하고 1971년에는 페르시아 제국 창건 2,500주년 기념식을 페르세폴리스에서 성대히 거행하기도 했다. 내정이 안정되자 팔레비는 중동의 경찰 역을 자임하고 군비 강화에 나섰다. 내용은 실상 미제 무기 수입이었다. 국민들은 이런 친미 노선에 굴욕감을 느꼈고, 이슬람 전통을 무시한 서구화 정책에 반감을 가졌다. 1979년 이슬람 혁명 이전에 노엄 촘스키가 쓴 글을 보면, 이란이 당시 중동에서 지금의 이스라엘과 같은 역할, 즉 '미국의 경비견 노릇'(이건 내 말이 아니라 이스라엘 어느 총리의 표현이다.)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모사데크 국민전선의 한 분파인 이란 자유 운동, 호메이니가 이끄는 이슬람 세력, 페다인(특공대 혹은 민병대)과 무자헤딘(이슬람 전사) 등 무장 단체들이 모두 반 팔레비 전선에 나서기 시작했다. 반 왕정 운동은 점차 조직화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