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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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프치히 시대(1723–1750) ===
좋은 환경 속에서 쾨텐 영구거주를 한때 결심했었으나 1723년 여러 사정때문에 [[라이프치히]]로 옮겼다. 독일 [[바로크 음악|바로크]]의 중요한 작곡가 [[요한 쿠나우]](Johann Kuhnau 1660-1722)의 후임으로 토마스 교회의 칸토르(합창장)에 선출되었다. 1750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의 27년간, 이 곳에 머무르며 교회음악의 최고 책임자로서, 또 사실상의 라이프치히 음악감독으로서 정력적인 활동을 계속하였다. 이 시대의 창작중심은 <[[마태마태오 수난곡 (바흐)|마태마태오 수난곡]]>(BWV244), <[[나단조 미사]]>(BWV232),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BWV248), 약 160곡의 교회 칸타타 등의 교회성악곡이지만,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그 대부분은 라이프치히 시대의 최초의 수년간에 작곡된 것이라 한다. 자기의 이상을 끝까지 관철코자 했던 바흐는, 시의 당국자나 교회의 책임자들과 자주 충돌하였으며, 교회음악의 일에 점점 열의를 잃어간 것같이 생각된다. 1724년 이후, 교회음악의 창작은 급격히 수요가 줄고, 그 대신에 세속 칸타타나 세속적 기악곡이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또한 1736년경부터는 새로운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이전에 작곡한 것을 고치기도 하고 몇 편의 작품을 곡집 형태로 정리하기도 하였으며, 혹은 그것들을 적극적으로 출판하기도 하였다. 클라비어를 위한 <[[파르티타]]>(BWV825-830), <[[이탈리아 협주곡]]>(BWV971), <[[골드베르크 변주곡]]>(BWV988) 등이 그 예이다. 1747년 5월, 바흐는 포츠담의 궁정으로 [[프리드리히 대왕]]을 방문하고, 왕이 제출한 주제를 바탕으로 즉흥연주의 묘기를 보였다. 이것이 동기가 되어 작곡한 것이 대왕에게 헌정한 <[[음악적 헌정]]>(BWV1079)이다. 그리고 1748년부터 다음해에 걸쳐 최후의 대작 <[[푸가 기법]]>(BWV 1080)의 작곡이 진행되었으나, 1749년 5월 뇌일혈로 졸도하여 시력도 잃어 <[[푸가 기법]]>의 완성을 보지 못한채, 1750년 7월 28일, 사망한다.
 
== 바로크 음악과 바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