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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헌정회가 [[마쓰시마 유곽 사건]]에 연관된 정우회 인사들을 거론하며 와카쓰키 내각의 퇴진을 요구했으며, 정우회는 1926년 11월 29일에 아나키스트 [[가네코 후미코]]와 한국의 독립운동가 [[박열]] 부부의 [[가네코 후미코#괴사진 사건|괴사진]]<ref group="주해">가네코가 박열의 무릎 위에 앉은 사진으로, 정부가 반역 사건 혐의자를 우대했다는 논란의 중심이었다.</ref>을 거론하며 이를 ‘국체 문제’로 규탄하면서 와카쓰키 총리가 “국체 관념이 없다”고 비난했다.<ref name="빅스_190"/><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6082800209201043&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6-08-28&officeId=00020&pageNo=1&printNo=2146&publishType=00020 박열 사진 사건으로 결국 내각 와해?], 동아일보, 1926년 8월 28일.</ref> 국가의 주권이 어디에 있는지를 두고 벌어진 ‘국체 논쟁’은 히로히토의 대리청정 기간에 일본에서 매우 중요한 논쟁거리였다. 하지만 이러한 ‘국체’ 논쟁은 ‘천황의 일본 통치는 정당하며 천황제는 지켜져야 하는 것’이라는 결론으로 돌아갔으며 오히려 [[니치렌종]] 등의 주도로 일본의 제국주의와 천황의 전제 통치를 정당화하는 전체주의, [[국가주의|초국가주의]] 사상이 널리 퍼졌다.<ref>빅스, 194쪽 ~ 202쪽.</ref>
 
== 일본 천황 자리에 오르다 ==
[[파일:Emperor Showa.jpg|섬네일|왼쪽|히로히토가 즉위 후 [[소쿠타이]] 차림으로 찍은 사진(1928년)]]
부왕부황 다이쇼는 1926년 12월 25일 새벽, 가나가와 현의 하야마 별장에서 죽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6122600209201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6-12-26&officeId=00020&pageNo=1&printNo=2266&publishType=00020 천황 폐하 붕어, 25일 오전 1시 25분]<!--卄 (廿)은 20을 나타내는 한자이다.-->, 동아일보, 1926년 12월 26일.</ref> 히로히토는 부황이 죽은 직후 124번째 천황 자리에 올랐으며<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6122600209201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6-12-26&officeId=00020&pageNo=1&printNo=2266&publishType=00020 동궁전하 어천조(御踐祚), 다이쇼 천황 붕어 즉시 거행], 동아일보, 1926년 12월 26일.</ref> 메이지 시대부터 내려오는 관례대로 열린 [[추밀원 (일본)|추밀원]]은 회의에서 새로운 왕을천황을 위한 연호를 정하게 됐다.<ref name="빅스_203">빅스, 203쪽 ~ 204쪽.</ref> 앞서 다이쇼 왕이천황이 죽기 몇 주 전 [[마이니치 신문]]은 궁에서 흘러들어온 풍문을 따라 새 황제천황 히로히토가 밝은 문화의 창달을 뜻하는 ‘고분’(廣文)이라는 연호를 쓰게 될 것이라고 보도했으나<ref>베르, 98쪽.</ref>, 추밀원은 왕의천황의 새로운 연호를 ‘'''쇼와'''’(昭和)라고 12월 26일에 대외에 공식 발표하였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6122600209201004&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6-12-26&officeId=00020&pageNo=1&printNo=2266&publishType=00020 쇼와로 연호 개원…], 동아일보, 1926년 12월 26일.</ref> 쇼와(소화)란 ‘밝은 조화’, ‘찬란한 평화’, ‘세상이 태평하고 백성과 임금이 하나됨’을 의미하는 한자어이다.<ref name="빅스_203"/><ref>[http://hanja.naver.com/word?query=%E6%98%AD%E5%92%8C 네이버 한자사전, "소화" (昭和)], 2012년 12월 2일 확인.</ref> 새 왕은천황은 같은 날, 육해군 장병과 와카쓰키 레이지로 총리, 황실 종친 간인노미야, 사이온지 공작을 불러놓고 모든 국민에 대하여 칙어를 내어 자신의 즉위를 선포함과 동시에<ref name="빅스_203"/> 칙어를 발표하여 후임 총리 천거는 마지막 원로 사이온지에게 맡기며, 군부의 특권을 인정할 것이라고 선언했다.<ref name="빅스_203"/><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6123000209201015&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6-12-30&officeId=00020&pageNo=1&printNo=2270&publishType=00020 천황 폐하의 말씀(칙어)], 동아일보, 1926년 12월 26일.</ref> 1928년 11월 10일에는 교토로 행차하여 즉위식을 거행하였다.<ref>빅스, 224쪽.</ref><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8111000209201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8-11-10&officeId=00020&pageNo=1&printNo=2951&publishType=00020 천황 폐하, 10일 즉위식 거행]<!--한문 임의로 옮김-->, 동아일보, 1928년 11월 10일.</ref>
 
히로히토는 이제 정치 세계에 깊숙이 개입할 수 있게 됐으며, 일명 ‘측근’이라 불리는 7명의 인사들이 히로히토를 옆에서 도왔다.<ref name="빅스_204">빅스, 204쪽 ~ 213쪽.</ref> 내대신 마키노 노부아키, 시종장 [[스즈키 간타로]]<ref group="주해">1929년 1월까지는 진다 스테미가 맡았으나 곧 죽었고, 마키노는 스즈키를 시종장으로 임명했다. 1936년에 사임했다.</ref>, 무관장 나라 다케지<ref group="주해">1933년에 퇴역했다.</ref>, [[가와이 야하치]], [[세키야 데이사부로]]<ref group="주해">[[조선총독부]]에서 학무국 관리와 중추원 서기를 지냈으며 [[시즈오카현]]지사, 궁내차관을 역임했다. 히로히토의 유럽 순방 때 따라갔으며, 히로히토의 결혼 준비에도 참여했다.</ref>, 식부차장 [[오카베 나가카게]] [[자작]] 등이 바로 그들이다.<ref name="빅스_204"/> 한편, 왕의천황의 총리대신 임명권은 사이온지가 대행했는데 사이온지는 궁내관 선임에도 커다란 발언권을 행사했다.<ref name="빅스_204"/> 그러나 1927년 이후에는 궁내의 측근들이 먼저 새 총리 선정을 협의한 뒤 교토나 [[오다와라 시|오다와라]], [[오키쓰]]<ref group="주해">지금의 [[시즈오카현]] [[시즈오카 시]] [[시미즈 구]]에 있는 마을로, 2005년 이후 단행된 행정구역 통폐합 이전에는 오키쓰 정을 거쳐 [[시미즈 시]]에 속해 있었다.</ref>의 별장에서 지내던 사이온지에게 사람을 보내 재가를 얻었다.<ref name="빅스_204"/>
 
사이온지와 마키노는 근대 정당의 역할을 무시했다는 데 공통점이 있지만<ref name="빅스_204"/>, 마키노와 궁중 측근들이 곤란한 정치 문제는 천황이 관여해야 해결할 수 있다고 본 반면 사이온지는 천황이 정치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을 반대했으며, 마키노가 극우 정치인들과 함께 행동하는 것을 염려했다.<ref name="빅스_204"/> 하지만 정치적으로 새로이 두각을 드러내던 [[기도 고이치]] 후작, [[고노에 후미마로]] 공작, [[하라다 구마오]] 남작 등은 정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천황의 권위가 필요하다는 주장에 가세했다.<ref name="빅스_204"/> 사이온지는 궁중의 정책 결정 과정에 더 이상 개입하지 않았고, 궁중 측근들의 판단에 따르기로 했다.<ref name="빅스_204"/> 사이온지가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뒤로 궁중 측근들은 영국, 미국 등의 대사관부터 일선 군부대에서까지 들어오는 다양한 정보를 히로히토에게 전달하는 구실을 맡았으며, 명목 상의 입헌군주였던 히로히토의 실질적인 권력 행사를 도왔다.<ref name="빅스_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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