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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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2 = [[대한제국 고종|대한제국 조선 고종 이형]]
|군주3 = [[대한제국 고종|대한제국 조선 고종 이형]]
|임기3 = [[1906년]] 2월12월 ~ 1906년[[1907년]] 3월1월
|직책3 = 前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대한제국 내각 영문하 총리대신 직무대행]]<br/>(前 大韓帝國 內閣 領門下 總理大臣 職務代行)
|경력 = 前 대한제국 조선 황조 개화파 출신 <br/>前 [[대한광복군 정부]] 정통령(19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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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일본]]에서 인기 있던 [[우에노 기요시]](上野淸, 1854~1924)의 '근세산술(近世算術)'을 번역·편집하여 《산술신서》(算術新書)를 편찬하였다.<ref> 박성래, [http://www.donga.com/docs/magazine/weekly/2004/08/06/200408060500016/200408060500016_1.html (박성래 교수의 ‘과학 속 세상史’) 독립운동가 이상설 한국 근대 수학교육의 아버지] 2004년 8월 12일자. </ref>
 
[[1904년]], 일제가 황무지의 개간권을 요구했을 때, [[박승봉]]과 연명으로 그 침략성과 부당성을 들어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이해 8월에 [[보안회]]의 후신으로 결성된 [[대한협동회]](大韓協動會)의 회장에 선임되었다. 다음해 [[1905년]] 법부 협판, 의정부 참찬을 지냈다. 이 무렵부터 그는 외국 서적등을 참조하며 만국공법(萬國公法) 등 법률을 번역하고 연구했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당시, 그는 조약 체결 결사반대와 [[을사오적|오적]]의 처단을 주장하는 상'''소'''를 고종에게 5차례 올렸으나, 12월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고 자결을 기도하였으나 실패에 그쳤다. 이후 국권 회복, 애국 계몽 운동에 앞장서게 되었다. [[1906년]], [[영의정]]([[영의정|내각 영문하 총리대신 직무대행]])에 임명되었지만 한 달 동안 있다가 사직하였다.
===헤이그 밀사===
[[1907년]], [[러시아 제국]] 군주 [[니콜라이 2세]]의 발의로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 평화 회의가 개최되자, [[대한제국 고종|고종]]은 그를 정사로 하고, 고종의 명을 받아 [[헤이그]]에 밀사로 파견되었다.([[헤이그 밀사 사건]] 참조.) [[대한제국 고종|고종]]의 밀지를 받고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1859년)|이준]], [[이위종]]과 함께 참석하려고 하였으나, 일제의 계략으로 참석을 거부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