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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왕은 678년부터 681년까지는 대리청정만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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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파일:Royal Tombs of Sinmun of Silla.jpg|썸네일|[[경주 신문왕릉|신문왕릉]]]]
문무왕과 자의왕후 김씨의 차남으로, 출생연도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665년]] 동복 형인 소명태자(昭明太子)가 죽자 태자에 책봉되었다. [[681년]] 8월, 왕비 김씨의 아버지인 소판 [[김흠돌의 난|김흠돌(金欽突)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처형되었다. 김흠돌은[[김흠돌]]은 [[김유신]]의 여동생인 [[정희]](政姬)의 아들로,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맞아들여 권력 기반을 강화하려 하였으나 이 과정에서 실패하였고 처형되었다. 그의 딸 역시 폐위되었다. 즉위 한 달 만에 발생한 김흠돌의 난을 진압하면서 신문왕은 진골 귀족을 숙청하였고 왕권 강화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후 683년 일길찬 [[김흠운]](金欽運)의 딸([[신목왕후|신목왕후 김씨]])을 왕비로 책봉하였다.
 
[[682년]] 6월, [[국학]](國學)을 설립<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08/신문왕|본기 권8 신문왕]] |인용문= 二年...六月 立國學}}</ref> 하여 예부에 소속시키고, 공장부(工匠府)에 감(監) 1인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