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파키스탄 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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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파키스탄 전쟁''' 또는 분쟁(Indo-Pakistani wars and conflicts)은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에서 진행된 전쟁이다. 제1차 (1947년 -), 제2차(1965년-) 제3차(1971년)로 표시된 인도 파키스탄 사이에서는 지금까지 세 번의 전쟁이 발발하였다. 1차와 2차는 [[카슈미르 분쟁]]의 과정에서 발발했으며, 제3차는 [[방글라데시]]의 독립에 즈음하여 일어났다.
{{전쟁 정보
|분쟁 = 인도-파키스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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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그림|파키스탄}} [[카와자 아시프]]
}}
'''인도-파키스탄 전쟁''' 또는 분쟁(Indo-Pakistani wars and conflicts)은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에서 진행된 전쟁이다.
==제1차 인도 파키스탄 전쟁==
{{참고|제1차 인도 파키스탄 전쟁}}
[[1947년]] [[영국]]에서 분리독립한 양국은 당초부터 대립을 계속하고 있었지만, [[1948년]]에 북서부의 [[카슈미르]] 지역의 영유권을 놓고 무력 충돌로 발전했다. 그러나 유엔의 중재로 휴전하였고, 그 때의 정전선에 의해 카슈미르가 분할되었다. 이것을 '''제1차 인도 파키스탄 전쟁'''이라고 한다.
 
==중국 인도 전쟁(1959-1962)==
{{참고|인도-중국 국경 분쟁}}
[[1950년대]] 후반부터 표면화된 가운데 대립의 영향으로 소련이 인도를 지원하자, 중국이 인도 파키스탄 전쟁에서 파키스탄을 지원하면서 중소 양국의 대립은 현저하게 두드러지게 되었다. 인도와 중국은 국경선을 둘러싸고 대립하였고, [[1959년]] 9월에 인도와 중국의 양군에 의한 무력 충돌이 일어나 [[1962년]] 11월에는 대규모 충돌로 발전했다. 주로 카슈미르와 동부 지역의 [[아커사이친]] 및 [[라다크]], [[잔스카르]], [[발티스탄]], [[부탄]]의 동쪽 동북 변경 지역(현재 아루나 찰 프라데시 주 )에서 치열한 전투가 일어났지만, 주도 면밀하게 준비하고 선제 공격을 했던 [[중국 인민해방군]]이 승리하면서 국경을 인도 쪽으로 전진하게 되었다. 전후, 인도는 핵 개발을 시작하게 된다.
 
==제2차 인도 파키스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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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동파키스탄에서 독립 운동이 벌어졌고, 그 독립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파키스탄군이 진압을 시작했다. 그러자 동파키스탄에서 많은 난민이 발생하여, 인도에 유입되었다. 그러나 가난한 인도에 대량의 난민을 떠안을 여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인도는 동파키스탄 독립을 위해 개입하였고, [[1971년]]에 세 번째 전면전이 발발했다. 이것을 제3차 인도 파키스탄 전쟁이라고 한다. 인도는 압도적인 인원으로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었고, 주요 전선에서 멀었던 파키스탄은 패배를 하면서 동파키스탄은 [[1971년]] 12월, [[방글라데시]]로 독립하게 되었다.
 
==카르길 전쟁==
==카슈미르 지역 분쟁==
{{본문|카르길 전쟁}}
[[1999년]]에 카슈미르의 카르길 지역에서 파키스탄군과 카슈미르의 반대로 인도 정부 활동가들이 관리 라인(휴전선)을 넘어 인도 군단 주둔지를 점령하고 양군이 충돌했다. 이것을 [[카르길 전쟁|카르길 분쟁]]이라고 한다.<BR><BR>
 
{{본문|카슈미르 분쟁}}
[[2019년]] 2월 14일 카슈미르 하계수도인 스리나가르 남쪽 27km 떨어진 풀와마 지구의 레트포라 마을 부근 국도에서 파키스탄 지원을 받는 이슬람 반군으로 추정되는 자폭테러가 인도 경찰들을 노려 40여명이 사망하였다.<ref>https://www.ajunews.com/view/20190303163426851</ref> 이에 대한 보복으로
2019년 2월 26일~27일 인도는 파키스탄 지역 테러 캠프에 공습을 하였고, 이 과정에서 파키스탄 전투기는 1대가 격추되고 인도 전투기는 1대~2대가 격추되었다. 산악지역에서는 파키스탄군이 쏜 박격포에 인도군 5명이 숨졌고 인도군이 쏜 박격포에는 파키스탄 민간인 6명이 숨졌다.<REF>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2/28/2019022800191.html</REF>
2019년 3월 1일~2일 접경 지대에서 포격전이 발생하여 인도쪽에서 3명, 파키스탄쪽에서 3명이 숨졌다.<REF>https://www.voakorea.com/a/4810473.html</REF>
==핵==
인도는 [[1950년대]] 이후, 파키스탄 외에도 [[중화인민공화국]]과도 대립하였고, 중국이 1964년 핵실험을 성공하자<ref name="BBC">{{뉴스 인용|제목=다른 나라들은 어떻게 핵무장을 했을까?|url=https://www.bbc.com/korean/news-41303422|날짜=2017-10-05|확인날짜=2018-07-02|뉴스=BBC}}</ref> 인도는 궁지에 빠졌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소련]]과 대립한데다가 [[미국]]과도 대립을 계속하고 있었기 때문에 핵을 속속 배치했지만, 인도 국경 부근에 배치했다는 의심을 샀다. 따라서 인도는 [[1974년]]<ref name="BBC"/> 5월 지하 핵 실험을 실시하였고, 핵 보유를 선언하여 세계에서 여섯 번째 핵보유국이 되었다. 인도가 핵을 보유하자 인도와 파키스탄의 균형은 무너졌고, 파키스탄이 인도에 일방적으로 불리한 상황에 처해 버렸다.
 
이것은 네 번째 전면전을 막는 데는 크게 공헌했지만, 파키스탄의 핵 개발로 치닫게 되어, [[1990년대]] 파키스탄도 핵무기를 보유한 국가가 되었다. 또한 중국은 파키스탄에 대한 대규모 군사 지원을 했고, 핵 개발 및 미사일 개발에도 지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무렵 [[유엔]]은 [[포괄적 핵실험 금지조약]](CTBT) 체결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으며, 이를 받아들인 1995년 중화인민공화국과 프랑스의 잇따른 ‘갑작스런 실험’이 비난을 받았지만, 1996년에는 [[유엔 총회]]에서 CTBT가 채택된다. 그러나 [[1998년]] 5월에 인도는 지하 핵 실험을 강행하였고, 이에 맞서 파키스탄도 며칠 후 핵 실험을 실시하여<ref name="BBC"/>, 세계에서 일곱 번째 핵무기 보유국이 되었다.
 
1995년과 1999년의 ‘[[카슈미르 분쟁]]’에서는 인도 파키스탄 양국의 대립이 극한으로 치달아 핵전쟁의 위기에 빠졌다. 그러나 1999년 파키스탄 군사 쿠데타로 취임한 무샤라프 전 대통령은 단계적으로 인도와의 협조 노선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과격한 테러 공격이 있어도 정치적으로 매우 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2008년의 뭄바이 동시 다발 테러 이후, 인도 파키스탄 관계가 다시 악화되었다.
 
== 각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