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케후 마사유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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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레이 스타일 ==
=== 타격 ===
신인일찌감치 시절에는주전 선수 자리를 꿰찼지만 주전으로 정착한 이후 수년 간은 중거리 타자였다. 그러나 팀의 주포였던 [[다부치 고이치]]가 1978년 시즌 종료 후에 트레이드로 이적하면서 장거리 타자가 되는 길을 택했다. 체격장거리 면에서타자로선 결코작은 유리하지부류에 못했던속한 가케후는 맹연습에 의한 신체 개조와 타법 개량에 힘썼고, 강인한 몸과 장거리 타자로서의 타법을 몸에 익혔는데 타구를 스탠드까지 날릴 수 있게 된 것이다. 팀 동료였던 [[랜디 바스]]는 “방망이는 당겨칠 수도 있고, 흘려칠 수도 있었다. 거의 완벽했다. 미일 야구였다고 생각했는데 [[조지 포스터]](전 [[신시내티 레즈]] 타자)가 그의 타격을 보고 ‘이 친구는 뭔데 왜 그렇게 공을 날려 보낼 수가 있냐!’라고 들어본 적이 있을 정도였다. 어쨌든 허리의 회전이 뛰어났다. 완력은 없었지만 하반신의 회전으로 때리는 선수로 공을 정확하게도 맞혔다. 오른손 투수도 왼손 투수도 큰 문제 없었다”라고 평가했다.<ref>{{뉴스 인용|date=2015-09-16|url=http://number.bunshun.jp/articles/-/824159?page=2|title=ランディ・バースが明かす、日本で戦った最高の投手とは?(2/3)|newspaper=Sports Graphic Number Web|publisher=[[분게이슌주]]|accessdate=2017-08-26}}</ref> 하지만 이 타법은 몸에 주는 부담도 컸기에 선수 수명을 단축시키는 한 원인이 됐다. 가케후 자신은 “몸집이 크지 않은 내가 홈런을 30개, 40개까지 늘리려고 육체적으로 상당한 무리를 했다”라고 말했다.<ref name="GTP87">《요미우리-한신론》 p.87</ref> 홈구장인 [[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홈런을 양산하기 위해 좌타자로서는 골칫거리같은 존재였던 해변 바람과 씨름을 벌이는 게 아니라 반대로 그 바람을 이용하는 방법을 거듭 연구했고 역방향인 좌측 스탠드에 홈런을 때려내는 독특하고 예술적인 공을 가볍게 밀어치는 타법을 익혔다.<ref>《요미우리-한신론》 p.19</ref> 이후 좌측으로 향하는 홈런이 비약적으로 늘어나면서 일본 야구계의 대표적인 홈런 타자 중 한 명이 됐다.
 
홈런은 ‘노리고 치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실수로 때린 홈런이 안타’라는 이미지를 지녔다.<ref name="GTP87"/> 다만 부상에 의한 컨디션 난조에서 복귀한 1981년에는 ‘4번 타자로서 전 경기 출장’을 목표로 삼았기에 홈런을 의식하지 않는 타격을 관철했다. 그 결과, 전 경기 출전을 달성함과 동시에 타율도 3할 4푼 1리라는 높은 숫자(자신의 최고 타율)를 남겼지만 1981년 시즌 종료 후에 가진 이벤트 때 팬들한테서 “홈런을 좀 더 보고 싶다”(그 해의 홈런은 23개)라는 말을 들은 게 계기가 되어 다시금 홈런을 의식한 타격으로 변경했다고 한다.<ref name="GTP88">‘만약 다부치가 남아 있었더라면’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는 말도 했다(《요미우리-한신론》 p.88 ~ 89).</ref> 가케후는 은퇴 후에 이 1981년이 “제일 자신다웠던 것일지도 모른다”라고 말해 “지금도 내가 홈런 타자라는 생각은 안 한다. (1981년과 같은 배팅을 할 수 있다면)다른 배팅, 다른 가케후가 있었을까하는 생각이 지금도 강하다”라고 말했다.<ref name="GTP88"/>
 
센트럴 리그 심판부장을 역임한 다나카 도시유키는 저서 《프로 야구 심판이기에 알 수 있는 것》에서 공수의 기술이 양쪽 모두 뛰어나면서 심판에 대한 태도도 좋았던 선수로 가케후를 높이 평가했다. 특히 타격면에서 가케후의“가케후의 타구는 방망이에 닿는 순간 극히 일순간이지만 공이 사라졌다고사라졌다”고 증언했다. 이것은 가케후가“가케후가 공을 바로 앞까지 끌어들여서 빠른 스윙을 실어 되치는 통에 공이 방망이에 달라붙어 있는 동안 시야에서 사라진 게 아닌가라고아닌가”라고 추측하면서, “투혼 드라마에 나올 법한 기술”이라고 평가했다.
 
투수의 버릇을 관찰해서 타종을 판단하는예측하는 것을 도중부터 그만뒀다. 그 이유는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다이요]] 소속이던 [[노무라 오사무]]와 상대했을 때 “버릇을 간파하고 있다”라고 생각해서 공을 쳤더니 그 공이 몸에 맞는 볼(머리 부분에 맞음)이 되어 버릇을 보고 판단하는 것에 대한 공포심이 생겼기 때문이라고 토로했다.<ref>《요미우리-한신론》 p.58 ~ 59</ref>
 
[[에가와 스구루]]는 저서 《에가와류 마운드의 심리학》(고사이도 출판, 2003년)에서 “가케후의 약점은 인코스로 높이 날아가는 공”이라고 지적했고 가케후 자신도 대담에서 ‘인코스에는 약하다’라고 인정했다.<ref name="GTP69">단 에가와는 《요미우리-한신론》에서 “다른 사람하고 비교하면 못하는 편은 아니다”라고 말했다(《요미우리-한신론》 p.69 ~ 70).</ref> 그러나 ‘4번 타자의 강함’을 상대팀 투수에게 과시하고자 인코스로 던져진 공의 컨트롤 미스를 우측 스탠드로 향하는 강력한 홈런으로 연결시키려 했다.<ref name="GTP69"/> 은퇴의 발단이 됐던 1986년의 몸에 맞는 볼도 우측으로 길게 늘이는 홈런을 치기 위해 인코스쪽의 공을 기다리다가 발생했다고 한다.<ref name="GTP127"/>
 
현재는 손목을 보호할 목적에서 [[손목밴드]]를 착용하고 플레이한있는 야구선수가 선수는적지 가케후가않지만 이를 가장 먼저 시작한 선수는 처음이었다가케후였다. 한편 아버지의 가르침도 있고 해서 배팅 글러브를 사용하지 않고 맨손으로 방망이를 쥐는 버릇은 은퇴할 때까지 계속 고수했다. 다만 수비 때는 글러브 아래에 장갑을 착용했기에 타석에 들어설 때는 그 장갑을 뒤쪽 호주머니에 쑤셔넣었다. 그 모습이 마치 원숭이 꼬리와 흡사해서 [[야쿠 미쓰루]]가 만화 소재로 삼은 적이 있다. 현역 후반부에는 로컷 타입의 스타킹을 즐겨 신었는데 이것이 ‘가케후 스타일’의 대명사가 됐다.
 
프로 15년 동안 공식전에서 [[끝내기 홈런]]을 때려낸 적은 한 번도 없었고 끝내기 안타도 1개에 그쳤다. [[일본 프로 야구 올스타전|올스타전]]에는 강해서 [[1978년 일본 프로 야구 올스타전|1978년]]에는 3타석 연속 홈런 기록을 남겼으며 또 [[1981년 일본 프로 야구 올스타전|1981년]]에도 2차전부터 3차전에 걸쳐 3타석 연속 홈런을 때려냈는데 그중 두 번째 홈런이 공식전에는 기록되지 않은 끝내기 홈런이었다. 현역 마지막 시즌이던 1988년 4월 26일에는 프로 생활에서 유일한 런닝 홈런을 때려냈다.<ref>우사미 데쓰야 저 《일본 프로 야구 기록 대감》(고단샤, p.423)</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