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조 시게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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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조는 중위로 진급해 [[1902년]]부터 육군대학교에 입교했지만 [[러일 전쟁]]을 이유로 중퇴하였고, [[1906년]]에 다시 들어가 다음 해 11월에 졸업하였다. 졸업 후에는 참모 본부에서 근무하였다. 참모 본부에 근무할 당시에는 참모본부원의 자격으로 베이징과 상하이에 주재하기도 했다. 후에 그는 참모 본부 지나 과장이 되었고, [[1919년]] 보병 제11연대장으로 옮겨가 [[시베리아 출병]]에 가담하였다. 출병이 끝난 직후에는 [[장쭤린]](張作霖) 군사 고문을 맡았다.
 
그는 보병 제4여단장, 육군 무관, 제10사단장을 거쳐 [[1931년]] [[8월]]에 관동군 사령관과 군사 참의관에 차례로 올라 [[만주 사변]]의 정점에 섰다.<ref>《한국사 이야기 21:해방 그날이 오면》143쪽~144쪽</ref> [[관동군]] 사령관 시절에는 [[한인애국단]]의 유상근(柳相根)과 최흥식(崔興植)이 그를 암살의 대상으로 삼았으나 발각되기도 하였다.<ref>《백범일지》240쪽</ref> [[1935년]]에는 [[러일 전쟁]]과 [[제1차 세계 대전]], [[만주 사변]]의 공을 인정받아 남작 작위를 수여받았고, 다음 해 4월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 군을 퇴사하고 나선 1938년 4월에 새로 생긴 부상병 보호원 총재, 1939년 7월부터 군사 보호원 총재가 되었고, 1945년에는 비밀고문관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직후인 1945년 11월, [[연합군 최고사령부]]에서 그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졌고, [[11월 30일]]에 일본 육군대학 내 보도회 이사장실에서 할복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ref>《일본제국 흥망사 (우리의 눈으로 본)》298쪽</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