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욱 (1548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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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청량사가 되어 [[명나라]]에서 조 2만 7000섬을 얻어오는 데에도 성공했다. 이후 [[강계]] 부사와 [[의주]] 부윤, 평안도관찰사, 병조참판, 한성부판윤, [[호조판서]] 등을 거쳐 [[1604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1606년]] [[우의정]]이 되고 [[좌의정]]으로까지 승진했으나승진했으며 [[1608년]] 광해군 즉위 후 [[유영경]]이 영의정 자리에서 쫓겨난 것과 다르게 허욱은 자리를 지켰으나, 대북세력의 탄핵으로 인해서 소북 [[유영경]]의 일파라 하여 파직당했다가 [[1611년]]에 광해군의 배려로 직첩을 돌려받고 다시 조정에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다시 [[능창군 추대 사건]]으로 인해 [[1616년]] 다시 직첩을 환수당하고 [[원주]]에 부처당하고 배소에서 사망했다.
 
사후 관직이 복구되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