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말말갈: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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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지계가 거느린 8부가 수나라에 투항하였던 사실에 비추어 보면 그 동안 옛 부여 지역을 지배해오던 속말말갈이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았고, 지금의 [[길림시]]를 중심으로 [[송화강]] 중류 지역에 속말말갈이 분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참고해보면 고구려의 북진으로 이통하 유역에 진출하였던 속말말갈은 북류 송화강 유역 동쪽으로 그 세력이 축소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ref>李仁哲, 6~7世紀의 靺鞨 > Ⅱ. 6세기 勿吉의 盛衰와 靺鞨 7種, 43쪽</ref>
 
속말말갈이 돌지계 세력만으로 구성된 것은 아니었다.<ref>송기호(2011), 『발해 사회문화사』,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88~97쪽.</ref> 오고부(烏素固部) 등 돌지계 세력과 구분되는 속말말갈의 부명(部名)도 찾아진다.<ref>김락기(2013), 『고구려의 東北方 境域과 勿吉 靺鞨』, 景仁文化社, 137~140쪽.</ref> 《수서》를 보면 속말부는 매양 고구려를 노략질하였다지만,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 세력처럼 고구려에 부속되었던 속말말갈도 있었다.<ref>이정빈 (2018), 《6세기 중·후반 요서말갈(遼西靺鞨)과 돌궐·고구려》 동북아역사논총, 29쪽.</ref> 속말부 자체가 하나의 통일된 부(部)가 아니라 수십 개의 작은 부로 이루어진 총체였던 것이다.<ref>河上洋, 渤海の地方統治體制ー一つの試論として , 東洋史硏究 42-2, 1983; 임상선 편역, 《발해사의 이해》</ref> 고구려가 598년 말갈을 이끌고 요서 지역을 선제 공격하였는데, 이때의 말갈은 돌지계의 이탈 이후 고구려에 복속한 속말말갈이다.<ref>김종복(2005), 《고구려 멸망 전후의 말갈 동향》, 동북아역사논총, 173쪽.</ref> 634∼635년 무렵 오소고(烏素固) 부가 [[당나라]]로 망명한 사건도 수당교체기에 고구려와 돌궐 간에 다시 속말말갈을 놓고 분쟁이 발생한 결과로 파악된다.<ref>日野開三郞, 1950,「隋唐に歸屬せる粟末靺鞨人突地稽一黨」,『史淵』45; 1991, 『日野開三郞 東洋史學論集 15 東北アジア民族史(中)』(三一書房), 320∼321쪽.</ref>
돌지계가 거느린 8부 외에도 수많은 부가 있었고<ref>돌지계가 거느린 8부에 속하지 않은 涑末靺鞨烏素固部落이《舊唐書》지리지 2 愼州 조에 보인다.</ref> 속말부 자체가 하나의 통일된 부(部)가 아니라 수십 개의 작은 부로 이루어진 총체였던 것이다.<ref>河上洋, 渤海の地方統治體制ー一つの試論として , 東洋史硏究 42-2, 1983; 임상선 편역, 《발해사의 이해》</ref>
 
고구려의 내분으로 인해 당나라에 투항한 [[연남생]] 투항할 때 거란과 말갈병을 거느렸다면거느렸는데, 이때의 말갈병은 요동 방면에 인접한 속말말갈일 가능성이 높으며, 연남생이 이적과 함께 평양으로 직공하였을 때에도 당연히 휘하의 거란과 속말말갈병을 동원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의 멸망 이후 이들은 당군에 편입되었을 것이다.<ref>김종복(2005), 《고구려 멸망 전후의 말갈 동향》, 동북아역사논총, 181~182쪽.</ref>
고구려가 598년 말갈을 이끌고 요서 지역을 선제 공격하였는데, 이때의 말갈은 돌지계의 이탈 이후 고구려에 복속한 속말말갈이다.<ref>김종복(2005), 《고구려 멸망 전후의 말갈 동향》, 동북아역사논총, 173쪽.</ref> 634∼635년 무렵 오소고(烏素固) 부가 [[당나라]]로 망명한 사건도 수당교체기에 고구려와 돌궐 간에 다시 속말말갈을 놓고 분쟁이 발생한 결과로 파악된다.<ref>日野開三郞, 1950,「隋唐に歸屬せる粟末靺鞨人突地稽一黨」,『史淵』45; 1991, 『日野開三郞 東洋史學論集 15 東北アジア民族史(中)』(三一書房), 320∼321쪽.</ref>
 
고구려의 내분으로 인해 당나라에 투항한 [[연남생]]의 투항할 때 거란과 말갈병을 거느렸다면, 이때의 말갈병은 요동 방면에 인접한 속말말갈일 가능성이 높으며, 연남생이 이적과 함께 평양으로 직공하였을 때에도 당연히 휘하의 거란과 속말말갈병을 동원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의 멸망 이후 이들은 당군에 편입되었을 것이다.<ref>김종복(2005), 《고구려 멸망 전후의 말갈 동향》, 동북아역사논총, 181~182쪽.</ref>
 
고구려 멸망 이후 안동도호부의 통제 하에 고구려 유민을 무마해야 할 [[보장왕]]이 681년 고구려 부흥을 위해 말갈과 모반을 도모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때 보장왕이 통모한 말갈은 말갈제부 가운데 요동지역에 근접한 속말말갈일 가능성이 높다. 속말말갈은 말갈제부 가운데 고구려 멸망
이후에도 다른 말갈제부와 달리 해체되지 않고 세력을 유지하였으며, 반당투쟁에 나섰던 고구려유민들의고구려 유민들의 일부가 이곳으로 흘러들어갔을 가능성이 높은 곳이었기곳이기 때문이다. 한편, 모반의 결과 고구려유민의 강제 이주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보장왕과 통모하였던 속말말갈의 경우도 강제 이주되었는데, 이때 걸걸중상·대조영 부자와 걸사비우가 영주로 강제 이주되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ref>김종복(2004),「발해의 건국과정에 대한 재고찰」,『한국고대사연구』34, 304쪽.</ref> 속말말갈이 고구려 부흥운동에 참전한 이유는 우선 남생 휘하의 속말말갈 병사가 고구려 멸망 이후에 당군에 편입되었기 때문에 당나라는 송화강 유역의 속말말갈 지역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희박하였기 때문이다.<ref>김종복(2005), 《고구려 멸망 전후의 말갈 동향》, 동북아역사논총, 182~184쪽.</ref>
 
== 속말말갈 지도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