쉴레이만 1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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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쉴레이만은 중요한 예술 후원자이기도 했다. 건축과 그림, 서예, 조명, 병기, 타일과 직물, 목제품, 금속제품 그리고 문학 등 모두가 그의 통치 기간 중에 꽃을 피웠다. 그는 어릴 때부터 시와 노래를 무척 좋아했으며, 출정 중에도 매일같이 일기를 써 훗날 《전쟁일록》이라는 책으로 펴냈다. 더불어 집정 기간 동안에 건축가 [[미마르 시난|시난]]을 시켜 [[쉴레이마니예 모스크]] 등 많은 [[모스크]]를 건축했다.
 
{{날짜|1566-05|링크}} 초, 쉴레이만 1세는 헝가리 원정을 위해 이스탄불을 떠났다. 이 원정은 쉴레이만에게 있어 13번째 원정이자, 최후의 원정으로 기억될 것이었다. 이미 70대에 접어든 그의 건강은 악화일로였는데, 특히 20년 가까이 괴롭힌 통풍이 문제였다. 때문에 원정에서 쉴레이만은 대부분을 마차에서 지냈고, 원정로 상의 도시에 입성하는 의식을 치룰때만 말에 올랐다. 원정을 시작한지 50일째 되는 날에 파디샤와 대재상 [[소콜루 메흐메드]] 파샤가 이끄는 5만 명의 오스만 군대가 [[베오그라드]]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오스만 군대는 헝가리 서남쪽 시게트바르를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시게트바르 성채는 오스만-합스부르크 국경 지대에 위치한 요지로, 당시 2,300명 가량의 병사가 니콜라스 즈리니의 지휘 아래에 수비중이었다. 오스만 군대는 시게트바르 성을 8월 초에 포위했고, 공성전은 약 1개월 가량 지속되었다. 쉴레이만의 건강은 이 기간에 크게 악화되었다. 결국 {{날짜|1566-09-05|링크}} 1시 30분 경 죽음을 맞이했다. 오스만 군대가 시게트바르 성을 함락시키기 직전의 일이었다. 니콜라스 백작은 해질녁까지 저항하였으나, 결국 휘하의 군대와 함께 전사하고 말았다.<ref>{{서적 인용|url=https://www.academia.edu/37604407/The_Memory_of_Szigetv%C3%A1r_and_Sultan_S%C3%BCleyman_in_Ottoman_Turkish_Culture|제목=The Battle for Central Europe: The Siege of Szigetvár and the Death of Süleyman the Magnificent and Nicholas Zrínyi (1566)|성=Börekçi|이름=Günhan|날짜={{날짜|2019-02-14}}|출판사=Brill Academic Pub|장=The Memory of Szigetvár and Sultan Süleyman in Ottoman/Turkish Culture|확인날짜={{날짜|2019-03-10}}}}</ref>
1566년, 만년에 접어든 술레이만은 마차를 타고 자신이 정복한 헝가리를 행진하던 중 그해 9월에 병영 안에서 평온하게 숨을 거두었다.<ref>후얀신주, 《18인의 위대한 황제들》, 이른아침, 149-151쪽</ref>
 
한편, 술레이만 이전까지 [[오스만 제국]]의 술탄들은 전통적으로 정식 결혼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8남 1녀의 자식을 두었던 쉴레이만은 사랑에 빠져서 결국 자신의 애첩 중 한 명인 [[록셀라나]], 훗날 사람들에게는 휘렘 술탄이라고 알려진 여인과 결혼했다. (수정 이전의 문서에는 쉴레이만이 일부일처제를 고수했다고 기술되어 있었으나, 훗날 셀림 2세가 되는 셀림과 황위다툼을 벌이다 처형되는 무스타파는 록셀라나의 아들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