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호: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내용 보강
편집 요약 없음
254번째 줄:
[[1932년]] [[4월]]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윤봉길 의거]]가 성사되자 [[김구]]는 임정 요인들에게 피신을 연락했지만 그는 연락을 받지 못했다. [[4월 29일]] 동지 [[이유필]]의 딸 생일에 선물을 사준다던 약속을 지키러 [[이유필]]의 집에 도착하던 중, [[윤봉길]]과 상해 홍구 폭탄 사건의 관련자로 지목되어, 일본 영사관 경찰과 합세한 불조계 [[프랑스]] 영사관 관헌에 체포되어 일본 영사관 경찰에 인도되었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상하이]] 영사관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5월에는 배편으로 서울로 호송돼 4년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이감되어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자신은 윤봉길 의거와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주장하였으나 석방되지 못하였다. 그가 체포되면서 안창호와 [[흥사단]]원을 중심으로 추진된 대독립당 추진 운동은 결국 무산되고 만다.
 
[[윤치호]]는 그가 사건에 관계되었을리 없다며 [[조선총독부]] 경무국을 찾아가 설득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안창호는 구속되었다가 재판을 받게 된다. 검찰의 심문과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그는 꼿꼿한 자세로 자신은 테러윤봉길 의거 사건과 무관함을 역설하였다. 허위 자백 요구에 그는 아는 사실이 없다며 "나는 밥을 먹어도, 잠을 자도 민족을 위해 먹고 잤으니, 앞으로도 민족을 위해 일하고자 함은 변함이 없다" 며 당당하였다. 뚜렷한 혐의점이나 관련성이 없었는데도 [[조선총독부]] 사법부 당국은 [[치안유지법]] 위반죄로 안창호에게 [[징역]] 4년형을 구형하였다.
 
《[[윤치호]] 일기》에 [[1933년]] [[10월 4일]]자 내용에 따르면, 안창호는 “[[일본인]]들은 최근의 적이지만 기호파는 500년간의 적이기에 먼저 기호파를 박멸하고 독립해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ref name="yoon1">윤치호는 기호파 가문이었고 그의 사위는 평양사람(서북파)으로 지역색이 달랐다. 《윤치호 일기》, [[1933년]] [[10월 4일]]</ref> 그러자 여운형, [[신흥우]] 등도 독립지사들과 함께 윤치호를 찾아가 서북파의 음모를 분쇄하기 위한 기호파 비밀결사를 제안하였다고 한다.<ref name="yoon1"/> 윤치호는 이를 자신의 일기에 기록으로 남겼고, 윤치호는 안창호와 신흥우, 여운형 등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의 지역감정을 놓고, “지역감정 하나로만 봐도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독립할 자격이 없다”고 비난했다.<ref name="yoon1"/> 이에 대해 안창호는 [[1932년]] 5월에 중국 상하이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고 징역 4년형 선고받아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한 상태였기 때문에 안창호나 여운형 등이 윤치호에게 찾아가 그런 제안을 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앞뒤 정황이 맞지않다는 반론도 있다. 그러나 안창호가 언제 그와 같은 발언을 했다는 것까지는 정확히 기록하지 않아 그 이전에 발언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