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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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초기 교회가 [[325년]]에 [[제1차 니케아 공의회|니케아 공의회]]에서 [[유월절]] 준수가 아닌 [[그리스도]]의 [[부활]]을 준수해야 한다는 [[신학]]적 이유를 제시하였다. 부활의 날짜를 [[춘분]] 이후 첫 [[보름]] 이후 안식일 다음 날([[일요일]])에 지키기로 정해졌고, 이에 따라 [[태양력]] 기준으로 [[3월 22일]]부터 [[4월 25일]]까지 사이에 위치하게 되었다. 부활은 죄로 인해 죽은 성도가 다시 살아나는 소망을 강조하는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 중 하나이므로, 부활절 또한 [[교회력]]에서 차지하는 중요도가 크다.
=== 유래 ===
부활절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지 3일 째 되는 날, 그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기독교]]의 경전인 [[신약성서]]의 복음서 중 [[마가마르코]](마르코), [[마태마태오]](마태오), [[누가루가]](루가), [[요한]] [[복음서]]의 기록을 따른다. 각복음서의 기록에는 약간이 차이가 있지만 전체를 통합하여 부활절의 전승으로 이해하고, 그 전승에 따라 부활절 예배와 예식, 행사 등이 생겨났다.복음서가 작성된 1세기와 2세기인 초대교회에서도 예수의 부활에 대한 강한 신념을 지녔으며, 부활절은 구약성서를 통한 전승과 예수가 복음으로 전한 [[하늘나라]]와 [[에세네파]]가 중요시했던 몸의 부활과 [[묵시론]]과 [[반제국주의]] 사상과 [[평화주의]] 사상들이 복합적으로 구성된 사건으로 본다.
 
1세기에서 3세기 경의 부활절은 [[성찬]]을 통한 기독교 [[복음]]의 완성을 확인하는 예배로 발전하였다. 초기 교회의 3대 신학 사상인 칼케돈(카르타고)과 안디옥(안디오키아),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하는 초대 신학 학파의 부활절 이해는 차이를 보였다. 칼케돈 학파는 [[회개]]를 위한 시건으로 부활절을 보았고, 안디옥 학파는 새로운 [[해방]]을 위한 사건으로 부활절을 보았으며,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인간이 진정한 [[진리]]를 알게 하는 사건으로 부활절을 보았다. 이런 세 가지 부활절의 이해는 복합적으로 변화하여 초기의 부활절과 차이를 지니게 되었다. <ref>후스토 곤잘레스. 《기독교사상사: 그 세가지 신학의 유형으로 살펴본》. 이후정 옮김. (서울: 컨콜디아사, 1991) </ref>
 
313년 기독교 공인 이후에 칼케돈이 [[콘스탄티노플]]로 흡수되면서 부활절의 개념은 칼케돈 학파를 중심으로 하는 부활절의 개념으로 변화하였다.<ref>후스토 곤잘레스. 《기독교사상사: 그 세가지 신학의 유형으로 살펴본》. 이후정 옮김. (서울: 컨콜디아사, 1991) </ref> 창조주의 완전한 질서로 창조된 세상이 인간의 죄악으로 분리되었고, 완전한 질서인 창조질서를 완전히 따른 것, 즉 [[율법]]으로서 복음을 따르는 질서적 교회의 모습과 예전(전례)을 구성하게 되었다. 점차 부활절 예식은 부활의 기쁨과 성찬의 나눔의 소박한 예전에서 점차 위와 아래가 구분되고, 예전 순서와 음악, 예법이 중요시되는 종합적 예식으로 발전하였다.
 
=== 시기 ===
부활절은 매년 그 날짜가 달라진다. 이르게는 3월 넷째 일요일, 늦게는 4월 넷째 일요일에 올 수도 있는데, 이는 부활절이 [[음력]]을 고려하여 지켜지기 때문이다. 초기 교회는 [[유월절]]을 기준으로 부활절을 지켰다. 그러나, 기원 후 4세기에 접어 들면서 부활절을 언제 지켜야 할 지에 관한 의견충돌이 생겼다. 부활절을 [[히브리력]]의 유월절에 따라 정해야 한다는 지역 교회들과 이에 반대하는 지역 교회들 간의 대립은 결국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니케아 공의회]]에서 '부활절 보름달'(Paschal full moon: [[325년]] 당시 [[춘분]]이었던 [[3월 21일]] 이후 첫 보름달) 다음의 [[일요일]]로 부활절을 정하면서 정리되었다. '부활절 보름달'이 일요일인 경우에는 그 다음 주 일요일이 부활절이다. 오늘날에도 이 방법으로 날짜가 계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