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록: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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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충청북도]] [[음성군|음성]]에서 출생하였고 한때 [[황해도]] [[해주시|해주]]와 [[인천광역시|경기도 인천]]과 [[양주시|경기도]] [[양주시|양주]]와 [[경성부]]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으며 [[경상북도]] [[경주시|경주]]와 [[전주시|전라북도]] [[전주시|전주]]에서 각각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1926년]] [[충청북도]] [[음성군|음성]] 향리에 귀향한 이후 줄곧 충청북도 음성에서 자랐으며 [[일본]] [[아이치 대학|도요하시 중학교]]와 [[나고야 대학|일본 육군예비사관학교]]와 [[군사영어학교|대한민국 군사영어학교]]와 [[대한민국 육군 보병학교|대한민국 조선경비보병학교]]를 거쳐 [[미국 육군참모대학교]] 졸업과 [[국방대학원|대한민국 국방대학원]] 행정학 석사 학위 취득을 거쳐 [[미국]] [[조지 워싱턴 대학교]] 대학원 정치학과를 정치학 석사 학위 취득하였다. [[1949년]] [[송악산 5·4 전투]] 당시, 유명한 육탄10용사를 배출한 육군 제11연대의 연대장이었다. [[한국 전쟁]] 초기에 육군 제11연대를 이끌고 [[고랑포 전투]]([[1950년]] [[6월 25일|6월 25]]~[[6월 26일|26일]])에 참여하였다. [[1951년]] 거창양민학살사건, 국민방위군 사건을 처리한 헌병사령관이었다. [[1950년]] [[민주국민당]] 의원이었던 [[서민호]]가 기생집에서 현역 육군 대위를 사살하자 [[이승만]]은 사형을 선고한 뒤 자비를 베풀어 사형을 면제시키는 것처럼 하려 하였으나 육군 준장 최경록을 비롯한 군관과 법관들의 거부로 무산되었다. 이승만은 이들에 대한 인사보복으로 대응하였다. [[1960년]] [[4·19 혁명]] 당시 계엄사령관 [[송요찬]]의 발포 명령에 대하여 최경록은 발포를 중단하도록 만류하였다. 4.19후 육군참모총장으로서 군의 숙정과 관련한 미국 측의 간섭을 일언지하에 거부해서 "파머 사건"을 겪었다. [[1960년]] [[5월]], [[허정]](許政)은 최경록을 육군참모총장에 채용하려 하였으나, [[장면]] 민주당 대표최고위원과 인연이 있던 최경록은 허정의 참모총장직 제의를 사양하였었다. [[1960년]] [[8월 23일]] 장면은 국군 인사를 단행, [[대한민국의 육군참모총장|육군참모총장]]에 최경록을 임명하였다. 그로부터 이듬해 [[1961년]] [[5월 22일]] 육군 제2야전군사령관 최경록은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였다.<ref name="강준만">[[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60년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4)</ref>{{Rp|96}} 최경록, [[강문봉]], [[전규홍]], [[이철승]], [[양일동]] 및 전 주미 대사관 참사관 부인들은 [[1963년]] [[3월 21일]], 미국 대통령 관저 앞에서 "군대는 정치에 간섭하지 말라", "박정희 군사독재 타도", "한국인은 군부정치를 원치 않는다", "한국인은 진정한 민주주의를 지지한다"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박정희 장군의 군정 연장 제안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ref>{{뉴스 인용 |url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3032200329201019&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63-03-22&officeId=00032&pageNo=1&printNo=5354&publishType=00020|제목 = 백악관앞에서데모 |출판사=경향신문 | 날짜 = 1963-03-22}}</ref> [[1967년]] [[10월 7일]] 상오, 박정희 대통령은 최경록 멕시코 대사 등 8명의 신임대사에게 신임장을 각각 수여했다.<ref>{{뉴스 인용 |url =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710070032920101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7-10-07&officeId=00032&pageNo=1&printNo=6766&publishType=00020|제목=8大使에信任狀 |출판사= 경향신문 | 날짜 =1967-10-07 }}</ref> [[1973년]] 교통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재직 시 발생한 [[이리역 폭발 사고]]([[1977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다. [[1980년]] [[8월 12일]] 국무회의에서 주일 대사로 임명되자, [[8월 13일]] 국회사무처에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하였다. [[1987년]] [[9월 17일]] 부터 [[1988년]] [[4월 28일]] 까지 제24대 [[대한민국재향군인회]] 회장을 역임하였고, 오랜 군, 관 생활을 통해 강직과 청렴이 그의 대명사처럼 되었다. [[2002년]] [[9월 3일]] 배우자 전자순(田慈洵) 여사와 2남 2녀를 남기고 향년 83세로 별세하였다.<ref>{{뉴스 인용 |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0081300099201013&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80-08-13&officeId=00009&pageNo=1&printNo=4443&publishType=00020 | 제목 =駐日大使 崔慶祿 씨 | 날짜 = 1980-08-13 | 출판사 = 매일경제}}</ref><ref>{{뉴스 인용 |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008130020920101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0-08-13&officeId=00020&pageNo=1&printNo=18110&publishType=00020 | 제목 =駐日大使 崔慶祿 씨 | 날짜 = 1980-08-13 | 출판사 = 동아일보}}</ref>
<ref>{{뉴스 인용 |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008130020920101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0-08-13&officeId=00020&pageNo=1&printNo=18110&publishType=00020 | 제목 =얼굴 崔慶祿 駐日大使 | 날짜 = 1980-08-13 | 출판사 = 동아일보}}</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