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금치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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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전쟁 정보|
분쟁=우금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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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접<br/>
*남접
|교전국2={{국기|조선|1882}} <br> {{국기|일본 제국}}
|지휘관1= [[전봉준]] <br> [[손병희]]
|지휘관2={{국기나라 그림|Flag of the king of Joseon.svg}} [[신정희]] <br> {{국기나라 그림|Flag of the king of Joseon.svg}} [[허진 (1853년) |허진]] <br>{{국기나라 그림|Flag of the king of Joseon.svg}} [[이두황]] <br> {{국기나라 그림|Flag of the king of Joseon.svg}} [[이규태]] <br> {{국기나라 그림|Flag of the king of Joseon.svg}} [[이기동 (1856년) |이기동]] <br> {{국기나라 그림|Flag of the king of Joseon.svg}} [[조병완]] <br> {{국기그림|일본 제국}} [[미나미]]<br>{{국기그림|일본 제국}} [[모리오 마사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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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기동 (관료) |이기동]]과 [[조병완]]이 농민군의 좌측과 우측을 공격해 농민군은 큰 사상자를 내고 공주 동남쪽 봉우리로 후퇴했다. 농민군 1대가 봉황산으로 진격해 공주감영을 공격하려 했으나 하고개와 금학골 골짜기에서 관군의 공격으로 실패했다. 이로써 농민군은 4일 간의 제2차 접전에서도 패배했고 [[전봉준]]은 군인, 이서, 상인들에게 지지를 크게 얻지 못했다. 조일 연합군은 [[12월 10일]]([[음력 11월 14일]])에 [[논산시|노성]] 주둔 농민군을 공격해 농민군은 대촌 뒷산과 소토산으로 계속 후퇴해 사기까지 떨어져 음력 12월에 [[전봉준]]은 체포되고, 이후 조일 연합군의 호남 일대의 농민군 대학살전이 일어났다.
 
====우금치 전투와 동학농민군의 패배요인====
[[파일:Gattling Rapidfire gun model.jpg|섬네일|일본이 보유했던 미국제 기관총. 패배 요인으로 주목된다.]]
동학농민전쟁의 가장 큰 전투이자 승패의 분수령이 된 결전이었던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한 원인으로는, 크게 1) 보유 무기의 심각한 열세, 2) 연합전선 실패로 인한 병력 분산, 3) 훈련받지 못한 농민군과 지휘 부족 등을 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