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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지 협판교섭통상사무로 [[톈진]]에 파견되어 해관사무를 교섭하다가 [[1883년]] [[5월]] 주한(駐韓) 미국 공사 푸트가 조선에 부임하자 그해 7월 고종은 미국으로 보빙사(報聘使:답례 사절)를 파견한다.<ref name="jy200905">[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3609789 민영익 등 보빙사 큰절로 禮 갖춰]{{깨진 링크|url=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3609789 }} 중앙일보 2009.05.16일자</ref> 민영익은 [[보빙사]]의 정사 및 전권대신이 되어 사절단을 이끌고 미국을 방문하였다. [[태평양]]을 건너고 [[샌프란시스코]]를 시작으로 미주 대륙을 횡단한 다음 뉴욕에서 [[체스터 A. 아서|체스터 아서]] 미국 대통령과 회동하고 국서를 전하였다. [[보스턴]] 등 각지를 순회하고 [[유럽]]을 거쳐 귀국하였다.
 
중도 개화파의 후원자였으며, [[1883년]] [[보부상]]을 단속하는 혜상공국(惠商公局) 총판이 되기도 했다. 1884년 10월에 친군영(親軍營)이 실시되면서 우영사(右營使)를 역임했다. 친일적 급진 개화파와 갈등이 생겨 [[1884년]] [[김옥균]] 등 급진 개화파가 [[갑신정변]]을 감행할 때 가장 먼저 자객의 기습으로 칼에 맞아 중상을 입었으나 독일인 [[묄렌도르프]]에게 구출되어 미국인 의사 [[호러스 뉴턴 앨런|알렌]]에게 치료를 받고 구사일생으로 회생하였다. 일본에 망명 중인 [[김옥균]]·[[서광범]] 등을 암살하기 위하여 자객을 밀파한 일도 있었다.
 
=== 망명과 죽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