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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개혁은[[갑오개혁]]은 일본의 주도로 시작된 개혁이다. 1895년 제2 차 [[동학농민운동]]이 발발하고, 청이 조선에 군대를 파병했다. 일본 또한 [[톈진조약]]을 구실로 조선에 파병을 하였다. [[톈진조약]]을 구실로 조선에 침투한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려는 욕망을 드러내자 조선 정부는 [[교정청]]이라는 개혁 기구를 새로 신설하여 자주적인 개혁을 하려는 노력을 했다. 하지만 일본은 이를 용인하지 않았고, [[교정청]]을 해체하고 [[군국기무처]]라는 기구를 신설하였다. 이에 조선 정부는 일본 주도의 개혁을 추진하게 되었다. 이렇게 추진된 개혁은 봉건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조선 사회 내부의 개혁적 요구를 반영해 신분제를 철폐하는 등 근대적 제도 개혁에서 중요한 진전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제국]]의 위세에 의존한 일부 세력을 중심으로 개혁이 추진된 근본적 한계 때문에 국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지 못했고, 일본이군사개혁에 소홀히 하는 등의 한계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러시아]], 등의[[독일]], [[프랑스]]의 [[삼국 간섭]]으로 그 위세를 잃으면서 추진력을 급격히 상실하였다. 조선 정부는 [[삼국간섭]]으로 러시아와 협력하는 것이 일본을 조선에서 몰아낼 수 있는 방법이라고 여기게 되었고, 친러정권이 수립된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일본이 다시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을미사변]]을 일으켜 [[명성황후]]를 살해하였으나살해하였다. 오히려 이는이에 신변의 불안을 느낀 고종의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신하는 [[아관파천]] 초래하였다발생하게 된다. 그 결과 [[러시아]]의 위세를 등에 업은 세력이 득세하였고, [[김홍집 (1842년)|김홍집]] 등 갑오개혁 중심 인물들이 백성들에게 살해되거나 일본으로 도주또는망명하여도주 또는 망명하여 근대국가 수립이라는 개혁의 목표는 실현되지 못했다.
 
== 배경 ==
== 갑오개혁 ==
=== 제1차 갑오개혁 ===
[[1894년]] [[7월 27일]]([[음력 6월 25일]])부터 [[12월 17일]]([[음력 11월 21일]])<ref name="제2차"/>까지 [[김홍집 (1842년)|김홍집]]을 중심으로 [[군국기무처]] 주도 하에 추진되었다.
 
제1차 김홍집 내각이 설치한 [[군국기무처]]는 김홍집, [[김윤식 (1835년)|김윤식]], [[김가진]] 등 17명의 의원으로 구성된 임시 합의기관으로서, 행정제도, 사법, 교육, 사회 등 전근대적인 여러 문제에 걸친 사항과 정치 제도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군국기무처의 회의총재는 영의정 김홍집이 맡았다. 특히 '[[개국 (조선)|개국]]' 기원 [[연호]]를 사용하여 [[청나라|청]]과의 대등한 관계를 나타냈고, 중앙관제를 [[의정부]]와 [[궁내부]]로 구별하여 기존 조선의 [[6조]]체계를 8아문(八衙門: [[내부 (대한제국)|내무]]·[[외부 (대한제국)|외무]]·[[탁지부|탁지]]·[[군부 (대한제국)|군무]]·[[법부|법무]]·[[학부 (대한제국)|학무]]·[[농상공부|공무·농상]])으로 개편하였으며, 이를 의정부 직속으로 두었다.
 
흥선대원군이 7월부터 8월까지 1개월 남짓 동안 [[섭정]]을 하였으나, 일본과의 입장 차이로 은퇴를 강요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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